[문학단상] "쓰려면 피로 써라" 니체가 던진 말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02-26 10:51:15
  • -
  • +
  • 인쇄


쓰려면 피로 써라!

니체가 던진 유명한 말이다. 피로 쓴다는 것은 어떻게 쓰는 것일까? 우리는 잉크가 담긴 펜으로 쓰고,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며 쓴다. 잉크 대신 피를 찍어 쓴다는 이미지가 풍기기도 한다. 대개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일부 독자들은 피땀을 쏟는 열정 혹은 치열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그럼 니체가 단지 글쓰기의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피'라는 메타포를 사용했을까?

수유너머의 니체 연구자와 '피로 쓴다'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대화했다. 우리 두 사람은 니체가 '피'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삶의 체험'이라고 해석했다. '차라투스트라'의 강조점은 언제는 천상에서 땅으로, 피안의 세계에서 대지로, 관념에서 몸으로, 형이상학에서 삶과 체험으로 향한다. 그러므로 '피로 쓴다'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직접 사유하고 깨달은 것을 쓰는 뜻으로 보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에 담긴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게으름을 피워가며 책을 뒤적거리는 자들을 미워한다."

자신의 체험과 삶을 그대로 담을 글이 곧 피로 쓴 글이다. 우리는 글을 잘 쓰려고 하고, 꾸미려 하며, 온갖 정보와 자료를 취합해 인용하고 편집하는 데 익숙하다. 글작업에 그러한 일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니체의 말은 우리의 쓰기 방식에 일격을 가한다. 자신의 끈끈한 체험이 담긴 붉은 피의 잉크로 쓴 글이야말로 진정한 글이다.

피로 쓴 시를 읽었다.

희망과 야합한 적 없었다 결단코
늘 한발 앞서 오던 체념만이 오랜 밥이고 약이었음을

고백한다 밤낮 부레끓는 숨과 다투던 폐암 말기의 어머니
착같이 달아 펄떡이던 몸뚱이를
일찍이 반지하 시린 윗목에 안장한 일에 대하여
마지막 구원의 싸이렌마저 함부로 외면할 수 있었던 조숙한 나약함에 대하여
방 한 귀퉁이 중고 산소호흡기를 들여놓고
새벽마다 동네 장의사 명함만 만지작거렸다
그 어떤 신념보다 더욱 견고한 체념으로, 어김없이 날은 밝아
먼 산 기울어진 해도 저토록 가쁘게
가쁘게 도시의 관짝을 여밀 수 있음을 알았다 습관처럼
사랑을 구하던 애인이 어느 막다른 골목에서 뒷걸음질쳐 갈 때도
시험에 낙방하고 아무 일자리나 찾아 낯선 가게들을 전전할 때도
오로지 체념, 체념만을 택하였다 체념은 나의 신앙
그 앞에 무릎 꿇고 자주 빌었으며 순실히 경배하였다
체념하며 산 것이 아니라 체념하기 위해 살았다 어쩌면
이제 와 더 깊이 체념한다 한들 제 발 살 려 다 오
[후략]
출처 : 심장에 가까운 말(박소란 시집), 창비

박소란의 시 '체념을 위하여'의 앞부분이다. 그의 시들을 읽으며 아팠다. 시집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시적 화자는 불행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이자 '나'이기도 해서 더 깊이 공감했다. 특히 '체념을 위하여'는 체념 경험을 진술하고 고통을 노래하는 쓴 맛 나는 절망의 찬가로 느껴졌다. '사회적 약자와 시대적 아픔을 개성적 언어로 끌어안았다'는 문단의 좋은 평가보다 독자들의 심장이 더 우렁차게 공명하였으리라. 체념이 굳센 신념이 되어 버린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대로 담아 생생하고 절묘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소란의 시들에는 생생한 언어와 현장감이 느껴진다. 전체 이미지가 매우 현실감이 있고, 실재 경험으로 읽혀진다. 읽는 내내 시인과 시적 화자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 듯 느껴졌다. 시 속의 화자는 불행과 상처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꾸민 고통이 아니라 경험한 불행으로 여겨진다. 여느 시들이나 작품들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과장된 아픔이나 미화되고 조작된 고통과는 전혀 맛이 다르다. 우리들 내면에서 침묵하고 있는 침묵의 체념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적 화자의 비명에서 우리는 숭고한 '피'를 맛본다.

글을 쓰다가 울었다. 작년 12월 어느 날, 동네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순간 눈물이 울컥거리는 것을 감지하고는 머뭇거렸지만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두 손으로 눈을 감싸고 오래 흐느꼈다. 나의 서사를 쓰는 중이었다. 아, 그 때 나는 정말 힘겨웠구나, 아팠구나, 두려웠구나, 외로웠구나, 슬펐구나! 눈물을 흘린 후 나는 맑아졌다. 이후 며칠 내내 나 자신에 대해 사유했다. 나를 공부했다.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평론가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말한 대목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도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나는 나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리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냉정하리만큼 무감각하면서 오히려 드라마를 보면서 울기를 잘 하는 우리, 정반대로 타인의 슬픔과 비극을 목격하면서 분노하며 복수의 기획을 하기도 하는 우리, 과연 자신의 슬픔의 깊은 곳에 닿아 본 적이 있을까? 나는 나의 슬픔을 공부하고 있다. 때늦은 공부이다. 타인의 슬픔이 더 잘 보인다.

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쓰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자기 삶의 서사를 쓰는 일이기도 하다. 피로 쓴 글, 작품, 말은 체험적이며 간증적이며 고백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삶쓰기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수자원공사, SK하이닉스와 PPA 체결...6월부터 수력에너지 공급

한국수자원공사가 SK하이닉스에 수력발전으로 생산한 전력을 직접전력거래(PPA) 방식으로 공급한다. 이를 위해 한국수자원공사는 30일 SK하이닉스 이천

"현대차, 배출량 전과정평가(LCA) 시스템으로 95%까지 추적 가능"

"현대차는 전과정평가(LCA) 시스템을 통해 자동차 생산에서 폐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95%까지 추적할 수 있다."홍성준 현대자동차

이니스프리, 수거 공병으로 만든 '마키토이 그린티' 한정판 출시

이니스프리가 국내 작가 '마키토이'와의 협업한 '마키토이 그린티' 한정판을 출시했다고 30일 밝혔다.이번에 출시한 '마키토이 그린티 리미티드 에디션

대한항공, 폐항공기 업사이클링…네임택·볼마커 굿즈 출시

대한항공이 폐항공기 동체로 제작한 업사이클링 굿즈 시리즈에서 에어버스 A380 기종을 활용한 제품을 처음 선보인다.대한항공은 브랜드 굿즈 공식 판

전국 226개 시군구, 첫 탄소중립 계획 수립…감축사업 본격화

전국 226개 기초지자체가 모두 탄소중립 실천전략을 담은 '제1차 시군구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수립해 5월 30일까지 환경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SK이노베이션 신임 대표에 SK E&S 추형욱 대표 선임

SK이노베이션이 추형욱 SK이노베이션 E&S 사장을 신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에는 장용호 SK(주)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SK이

기후/환경

+

온난화로 미국과 캐나다 빙하 70~80% 사라질 위기

지구온난화로 전세계 빙하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지고, 특히 미국 서부와 캐나다의 빙하는 최대 80%까지 없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29일(현지시간)

[영상] 캐나다 134건 산불 동시다발...매니토바주는 '불바다'

캐나다 서부 매니토바주에 22건의 대형 산불이 동시 발생하는 국토 전역에서 134건의 산불이 발생했다.28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매니토

美 청소년들 트럼프 反기후정책에 제동..."생명권 침해" 헌법소원 제기

친(親) 화석연료 정책을 추진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청소년들에게 '생명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소원을 당했다.30일(현지시간) 비영리 법률단

하와이 산호초까지 위험하다...기후변화와 성게 급증이 원인

하와이 산호초들이 파괴되고 있다. 기후변화로 가득이나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데 급증한 성게의 먹잇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28일(현지시간) 켈리 반

AI가 제작한 국내 '홍수 위험지도'...침수위험 높은 지역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이 의외로 홍수에 취약한 지역인 것으로 인공지능(AI) 분석에서 나왔다.포항공과대학교(POSTECH)와 경북대학교가 인공지능(AI)을 통

EU '2030 55% 감축' 목표 근접…2040년까지 90% 줄인다

유럽연합(EU)이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온실가스를 55% 감축한다는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2040년까지 90% 감축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EU집행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