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어느 폐지공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02-19 1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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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독은 시끄럽다. 온갖 사념이 자아내는 소리들로 소란하고 잡다한 기억의 이미지들로 복잡하다. 이 고독은 견디기 힘든, 그래서 벗어나고픈 고독이다. 체코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는 고독의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고독이 너무나 시끄러운 이유

주인공 한탸는 폐지 압축기의 소음이 가득한 곳에서 홀로 일한다. 주기적으로 압축기의 버튼을 누르며 책과 폐지를 분쇄해 정육면체 꾸러미로 만드는 작업이다. 기계음이 요란한 그곳에서 그는 맥주를 마시며 버려진 책들을 펼쳐 읽는다.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시끄러운 두 소리가 작업실에 웅성거린다. 기계 소리와 한탸의 멈추지 않는 사유. 버려진 책들과 금서로 분류돼 폐기되는 책들 가운데 그는 보물을 발견한다. 희귀 도서를 발견하면 집에 가져가 쌓아두고 읽는다. 이것이 한탸의 책읽기 방식이다. 지극히 단조로운 작업 중에도 그의 상상력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서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기 몸에 맥주 내음과 악취가 진동해도 가방에 든 책만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한다. 폐지 압축공이라는 자신의 일을 '신께서 축복하신 직업'이라는 생각까지 한다.

어느 날 맥주를 통째 들이키며 일하는 한탸는 두 사람의 환영을 본다. 예수와 노자, 두 인물은 <성경>과 <도덕경>이라는 신성한 책을 대표한다. 예수와 노자는 압축기의 전진-후진 버튼에 대응한다. 예수는 미래로의 나아감과 낙관의 소용돌이를, 노자는 근원으로의 후퇴와 출구없는 원환을 표상한다. 예수는 탄생(나옴), 노자는 죽음(들어감)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폐지가 압축기로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고, 꾸러미가 되어 나오는 것은 부활인 셈이다. 아름다운 문장들과 그림이 펼쳐진 책이 포개져 압축되고 파괴되면 폐지 꾸러미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된다. 압축기는 세상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삼키고 짓이겨놓는 힘, 하지만 그 속에서 다른 것이 생성해 나오는 기계이기도 하다.

그의 고독은 기계음과 사유의 운동으로 시끄러웠다. '시끄럽다'라는 번역어의 이미지는 소음(noisy)이지만 영어로 'loud'다. 그 소리는 불쾌하고 거슬리는 소리가 아니다. 울림이 큰 소리이자 고요하고 신성한 진동이다. 책들의 저자와 사상가와 현자들의 말이 그의 고독을 채운다. 이런 고독 속에 머물기를 35년, 그는 마침내 '현자'가 되었다.

◇고독을 끝까지 사랑하기

한탸는 고독을 즐기는 지하의 작업실에서 추방당한다. 부브니에서 거대한 수압 압축기가 도입되고 젊은 작업자들이 한탸 자리에 대신 배치됐다. 그들은 한탸와 달랐다. 그들은 폐지 사이의 문장을 읽지 않는다. 종이의 감촉과 감각적인 매력에 무감각하게 장갑을 끼고 일한다. 맥주 대신 우유와 코카콜라를 들이키고, 잡담을 하면 휴가나 여가 계획을 요란하게 말한다. 게다가 새 기계는 놀라운 성능을 발휘한다. 한탸는 그들에게 절망했다. 자신만의 공간을 상실한 그는 백지를 처리하는 인쇄소에서 다시 일을 시작한다. 작업 현장에서는 생산성 향상이라는 구호 아래 획일적이고 새로운 방식이 도입됐다. 한탸는 자신이 마치 기계부품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그는 '비인간적인' 작업방식을 거부한다.

한탸는 선택한다. 고독을 지키고 끝까지 사랑하기로. 마침내 한탸는 평생 동고동락 했던 압축기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많은 독자들은 이 장면에서 허먼 멜빌이 쓴 <필경사 바틀비>를 떠올린다. 바틀비는 자신을 고용한 변호사가 일을 지시하자 이렇게 대답한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는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지 사흘만에 작업을 거부한다. 수동적인 저항으로서 태업이자 파업이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의 한탸 역시 새 압축기를 보고 온 뒤 사흘만에 작업장으로 돌아와 삶을 마감한다. 바틀비와 한탸는 닮았다. '사흘'이라는 시간도 유사하다. 이 시간성은 자신에게 강요되는 현실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다시 부활한다는 은유적 이미지를 자아내는 듯하다.

삶은 인간적이지 않다. 자동기계로 움직이는 노동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불쑥 우리 삶의 바탕을 뒤흔든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지켜내고자 한탸는 압축기 속에서 녹색 버튼을 누름으로써 폐지와 하나가 되었다. 한탸는 자기 소멸을 선택함으로써 예수와 노자의 스토리를 잇는다.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근원으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미래로의 후퇴)가 융합한다. 그는 스스로 선택한 고독을 끝까지 사랑했다.

◇ 인간적인 서사의 불가능성?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한탸가 깊은 문장들을 접하며 터득한 지혜가 담긴 자조적인 독백이다. 해답없는 현실, 절망적인 운명 그리고 희망의 출구를 더듬는 포효다. 하늘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다. 그럼 가장 인간적인 것, 그것은 무엇일까? 무화(無化)를 선택하는 길밖에 없을까? 문학적 서사의 결말은 언제나 허무주의적 비극미의 충동으로 가득해 보인다. 상상 속에서는 비극을 향유하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나머지 비인간화되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존엄을 포기하는 시나리오는 슬프고 아프다.

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들이 만날 때 생성된다. 가장 인간적인 것은 나의 고독과 너의 고독을 연결하는 일, 나의 사색과 우리의 토론이 결혼하는 일, 나의 시끄러운 고독이 우리의 시끄러운 행진이 될 때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오래 망각하고 삭제해 버린 연민과 사랑을 되찾는 일, 그것이 그 길일 게다.

다른 서사를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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