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부터 진심으로 말하며 가슴을 열어야
요즘 '소통'이라는 말이 흔하게 들린다. 정치권에서도 언론에서도 직장에서도 앵무새처럼 되풀이된다. 그런데 속 시원한 소통은 이뤄지지 않고 소통의 연출만 요란하다. 그래서 소통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 남 탓만 할 일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통에 온갖 어려움을 겪는다. 말을 하고 대화를 할수록 엇갈림을 경험하고 불통과 먹통에 이르기조차 한다. 왜 이럴까? 사람들이 죄다 나쁜 사람이라서 그럴까? 아니다. 우리가 소통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사이비 소통이 창궐하면서 가짜 소통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 소통은 진정성이 열쇠다
소통이 이뤄지려면 먼저 소통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나 자신부터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소통의 가슴을 지니지 않고 요란하게 제스처만 한다면 그 누구도 진심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소통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비소통적인 경우가 많다.
소통하려면 타인의 목소리와 요구에 귀 기울이고 대화하는 열린 가슴을 가질 일이다. 무엇보다도 형식적인 듣기가 아니라 '깊은 듣기'(deep listening)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을 듣고 읽고 수용하는 것이 소통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내가 소통할 뜻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장이 있었다. 그는 회사와 직원을 사랑하고 귀가 열려있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선언했다. "나의 방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언제든 찾아오세요. 누구나 환영합니다." 하지만 그 방문에 노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가 소통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자신의 방을 오픈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를 소통의 통로라고 착각하고 이런 조치를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은 매우 파격적인 경영자라고 착각했다. 그가 진정으로 소통을 하려면 직원들을 찾아가야 했다.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함께 어울리며 소통적인 접촉을 하여야 했다.
함께 식사하기도 하고 개인적인 대화와 소소한 잡답도 나누고 고충에 귀를 기울이는 등 다양한 경로의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밑바닥 현장의 소리를 들기 위해 작업장을 찾아갈 수도 있다. 회의 자리에서 서로 눈치 보지 않고 수평적인 대화를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먼저다. 이 사장의 문제는 소통의 장을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 '소통의 장' 보이지 않는 암초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와 독일의 사회철학자 하버마스(Jurgen Habermas)는 공통적으로 사회적 소통이 이뤄지는 '공론의 장'(public space)을 강조했다. 공론이 펼쳐지는 공공의 공간이야말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자 희망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정치인이나 여러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입을 모아 소통과 '공론의 장'을 강조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한국사회는 공론의 장이 매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같다. 여론조사들이 상시 이뤄지고 있고, 언론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되고 다양한 언론 매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법이나 정책 결정과정에서 시민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절차들이 가동되고 있으며, 소셜서비스(SNS)나 광장에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봇물처럼 표출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공론의 장이 잘 펼쳐져 있는 민주주의 사회로 보일 정도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공동체를 주창한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공동체가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누구든 자신의 타당한 요구를 '토론이라는 형식' 안에서 정당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추구한 소통의 모델은 다음과 같다. 먼저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나 왜곡을 넘어 내외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것(권력으로부터 독립), 충분히 토론할 것(소통행위), 의사소통을 통해 보편적 규범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것(사회적 합의). 이 세 가지다. 하버마스는 이런 과정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진영적 틀을 넘어서는 이상적인 소통가능성과 담론상황을 추구했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봤다.
하지만 하버마스가 말하는 것처럼 소통이 이뤄지는 사회는 거의 없다. 여론과 공론이 왜곡되고 교묘하게 조작되기 일쑤다. 더구나 그가 말하는 '토론이라는 형식'은 서구의 직접적인 의사소통 문화와 토론의 룰을 가진 문화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의회가 하나의 기득권 집단 혹은 의회권력이 되어 특정한 이익을 추구할 경우에는 공론의 장이나 '토론과 합의'는 거짓된 제스처로 끝나고 만다. 특히 이데올로기적 대결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적의와 음모가 만연한 정치문화에서는 그가 말하는 '소통행위'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요식행위나 기만적 절차가 되기 마련이다.
'담론의 질서'를 쓴 미셸 푸코의 입장은 하버마스와 정반대다. 그는 중립적이고 이상적인 담론상황이나 소통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가령 사회적 의사소통이 투명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같은 경우도 그것은 그 사회의 담론이 정의한 규칙에 따른 것에 불과하며, 거기서 발언할 수 있는 주체는 사실상 소수라는 것이다. 소위 대의된 정치인들과 지식인들과 전문가들만이 힘을 지니고 권력을 행사하는 마당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그 발언에서 배제된 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소통과 담론의 규정성 안에서 이미 정해진 특정한 결론과 실천을 강제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이 통렬한 것은 소통의 과정에서 보이지 않은 힘의 불균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지배적인 담론 내부에서의 소통은 언제나 동일하거나 유사한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노사정 합의라는 소통 과정, 한 정당 안에서 이뤄지는 끝장토론, 국회라는 대의기구 안에서 이뤄지는 온갖 협상들을 한번 생각해 보자. 그나마 정면충돌을 최소화하는 절차적 틀이지만 언제나 미리 정해진 소통의 규칙에 따라 사회의 지배적인 담론의 테두리 안에서 토론과 협상이 진행되므로 보통 예견되는 범위 안에서만 결론이 내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푸코는 소통의 왜곡을 제거하고 보편적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특정한 실천과 결론을 강제하는 담론형성체의 전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 태도를 바꾸면 소통이 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적인 '소통'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소통의 정신과 힘을 배양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한 인격체로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견해와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 침묵의 강요에 대해서는 저항을, 소통과 정보의 왜곡에 대해서는 리터러시와 바로잡기를, 힘의 불균형 상황에서는 연대를 통해 소통력을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의 집단지성이 더더욱 요구된다.
우리는 일상에서 어떻게 소통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영국의 소통철학자 허버트 그라이스(Herbert P. Grice)는 대화의 준칙을 4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정보다.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적절한 정보, 서로에게 필요하고 상대방이 요구하는 정보, 경우에 따라 모든 정보를 주어야 한다. 둘째는 진실성이다. 이는 정직하라!는 절대적 요구다. 이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요구되는 격률이다. 자신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관련성이다. 화제와 관련있는 말을 해야 한다. 엉뚱한 말, 초점이 빗나간 언술, 연결점이 빈약하거나 전혀 없는 말을 쏟아낼수록 대화는 공전되고 흐지부지된다. 서로 다른 말을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표현의 경제성이다. 즉 간결하고 명료하게 말해야 한다. 명료한 언어를 선택하고 모호하지 않은 표현으로 말하는 것이다. 애매모호하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하기 힘든 말은 대화의 언어가 아니다. 속마음을 숨기고 빙빙 돌려 이야기해서도 곤란하다. 표현이 경제적이어야 한다. 장황하고 산란한 말은 대화나 설득으로 이어질 수 없다.
우리는 대개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확신 가운데 말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조금만 태도를 바꾸면 소통이 잘 이뤄진다. '네가 옳다!' 이 말을 던지는 순간 대화가 시작된다. 그렇다고 내가 틀리거나 손해보는 것도 아니다. 나의 의견이 소중한 것처럼 상대방의 의견이 소중하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전쟁이 그치게 된다. 때로는 '네가 옳고 나는 틀리다!'고 말하는 순간, 대화와 협상이 쉽게 이뤄지기도 한다. 이 단순한 역설의 신비를 한번 테스트해 보면 그 놀라운 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 상대방을 진멸할 것이 아니라면 대화하고 상생하는 것이 지혜다. 내 속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만연한 불신과 적의와 혐오부터 걷어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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