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사상과 행보는 모두 대종교와 맞닿아 있어
사상가이자 독립투쟁가로서, 조소앙 선생의 자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보적이고 독창적이다. 삼균주의‧육성교‧대동종교 등 그가 추구하고 개척한 가치는 큰 업적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명 제정이나 민주공화국의 기초 확립에도 조소앙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특히 그의 '삼균주의'는 우리 고유의 사상적 기반을 통해 정치의 균권(均權), 경제의 균산(均産), 교육의 균학(均學)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을 기반으로 개인·민족·국가의 평등을 강조한 사상이다. 삼균주의는 우리 민족의 특수성을 통한 세계적 보편성을 지향한 사상으로, 그가 꿈꾸던 이상세계이자 오늘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의 업적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은 독립투쟁가로서 요약될 수 있지만, 선생이 대종교인으로 지내온 역사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기에 기술해 보고자 한다. 선생이 대종교의 교인으로 기록된 1차 자료는 안타깝게도 남아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대종교 교인들의 입교기록과 관련된 교단 내의 문서가 대부분 소실됐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의 대종교에 대한 철저한 감시‧통제와 무관치 않다. 대종교가 중광된 1909년부터 일제통감부 경시청의 감시를 시작으로 해서, 1942년 임오교변(壬午敎變: 대종교 간부 일제 구속 사건)에 의해 모든 서류와 서책이 압수되기까지, 대종교단 내 문서의 체계적 관리·보관이 불가능했던 정황과 직결된다.
당시 대종교 총본사가 소장하고 있던 신간서적 2만여권 및 구존 서적 3000여권, 그리고 천진(天眞, 대종교에서 모시는 단군영정)과 인신(印信), 각종 도서 전부와 각지의 대종교지도자들이 체포될 당시에 발견된 서물(書物) 600여종 등이 일제에 의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소앙 선생의 대종교 입적상황도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핵심 사상인 삼균주의(三均主義)가 대종교의 사상에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선생과 대종교가 일접한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호산 박명진의 '대종교 독립운동사'에 의하면, 조소앙 선생은 서일이 이끌던 대종교 동일도본사의 핵심 교인으로 기재돼 있음도 이를 방증한다.
조소앙 선생은 스스로 대종교의 교인이라고 공언한 일은 없었으나 선생이 1913년 상해로 망명하게 된 것도 대종교의 핵심 간부였던 예관 신규식에 의한 것이었고, 중국에서나 만주에서나 대종교도들과 어울리고 함께 행동했음은 사료로 남아있다. 선생은 대종교와 관련된 자취를 살펴보면 1914년 '육성일체(六聖一體)‧만법귀일(萬法歸一)‧금식명상(禁食冥想)'의 새로운 민족종교인 육성교(조소앙은 육성교에서 단군을 제1로 내세웠다)를 구상했다.
또 1916년에는 만주와 노령 등지를 찾아다니면서 대종교인 이상설‧이동녕‧박찬익 등과 교유했으며, 1917년에는 대종교의 교인들을 중심으로 '대동단결선언서'를 작성해 반포했다. 이어 1918년 만주로 들어가 대종교 관련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면서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 및 배포함으로써 대종교적 사상에 대한 밀접함을 엿볼 수 있다.
1922년에는 '발해경'(渤海經)의 집필과 함께 '독립신문'에 '3‧1독립신고'를 발표하기도 한다. 사상적으로나 인맥적으로 모두 대종교와 무관치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이 대종교도와 많이 접촉하고 큰 감명을 받은 것은 역시 1918년에 만주로 가서 대종교도인 윤세복‧윤기섭‧이시영‧여준‧김좌진‧황상규‧박찬익 등을 만나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했을 때다. 이때 서명자 39인 중 대다수가 대종교도였고 그들의 주장을 반영한 동선언문에는 대종교 정신을 담은 내용들이 대거 반영됐다. 후일 선생이 '삼균주의'의 이념적 근거를 단군의 '홍익인간'과 신지비사의 '수비균평위 흥방보태평'에 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삼균주의'는 조소앙 사상의 핵심이다. 이는 독립운동의 기본방략 및 미래 조국건설의 지침으로 삼기 위해 체계화한 민족주의적 정치사상이다. 삼균주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의 기초이론이자 한국독립당의 지도이념이로도 채택됐다. 삼균주의의 이론적 근거는 단군의 '홍익인간'과 '신지비사'로, 대종교적 정치관과 밀접하다. 삼균주의나 종교적 구상인 육성교 그리고 일신교령(一神敎令)이라는 경문 등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대종교의 교리적 영향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밝혔듯이 조소앙이 기초하고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 대종교적 사상 요소가 가득 담겨있다는 것도 또한 무관치 않다.
'대한독립선언서'에 들어있는 민족평등‧평균천하‧동권동부(同權同富)‧제남녀빈부(齊男女貧富)‧등현등수지우노유균(等賢等壽知愚老幼均)‧인류의 평등실시 등의 평등주의적 표현이 그것이다. 삼균주의의 이념적 근거가 자연스레 단군의 '홍익인간'과 '신지비사'의 '수비균평위 흥방보태평'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대종교의 교리·교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대한민국건국강령'과 '한국독립당당의해석'에 실린 다음의 내용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건국정신은 삼균제도의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선민이 命명한 바 수미균평위하면 여방보태평하리라 하였다. 이는 사회 각층 각계급의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향유를 균평하게 하며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유하리라 함이니 홍익인간과 이화세계하자는 우리 민족이 지킬 바 최고공리…"
"당의의 중심사상은 평등이다. 우리 선철은 말하였으되 '수미균평위하여 흥방보태평함이 홍익인간하고 이화세계하는 최고공리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머리와 꼬리(上下라고도 할 수 있다)의 위치를 고르게 함으로써 나라를 흥왕케 하며 태평을 보전함이 널리 인간을 유익케 하며 세계를 진리로써 화하는 가장 높은 공리라 함이다. …(중략)… 물이 평함을 부득하면 반드시 명하며 명하여도 평할 길이 없으면 필경 난에 이르게 되고 수미의 위가 평균하면 인간을 홍익할 뿐만이 아니라 세계까지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과를 불환하고 불균을 환할지니 이는 동서고금에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인 것이다."
'신지비사'를 전하는 '신지'라는 인물은 대종교 경전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이다. 대종교의 '신사기'를 보면 삼백 육십 육사를 주관해 다스리는 삼선사령(三僊四靈) 중,사관(史官)의 과업을 맡고 있는 인물이 신지다.
"신지야! 너는 사관[史]이 되어서, 문서[書契]를 맡으라. 맡은 뜻을 드러내고 글은 일을 기록함이니, 백성을 옳음으로써 가르쳐서, 하여금 좇을 바를 알게 함이 오직 너의 공적이니라. 힘쓸지어다."
-신사기 중
근대에 들어와 '신지비사'를 처음으로 언급한 인물도 대종교 대종사 홍암 나철이었다. 나철은 1914년 '제고령사제문'과 1916년 순교(殉敎) 당시 유시(遺詩)로 남긴 '중광가'(重光歌) 41장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삼균주의의 역사적 근거가 되는 신지비사 내용 또한 대종교의 영향이 컸음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조소앙이 삼균주의를 통해 이르고자 했던 최고(最高)의 공리가 홍익인간·이화세계라는 것도, 곧 대종교가 독립운동의 궁극적 목적에 있어, 조국의 광복을 넘어 배달국 이상향을 지상에 건설하려는 사상적 배경과 일치된다.
특히 나철이 남긴 '중광가'에서는 홍익인간과 '신지비사'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천악신기보아라 종인도 홍익홍제
흑계적계 운운과 보화통방 뉘알고
신공비사 풀어라 칭추극기한 천하
백아강 균등위에 만방세세 보태평"
인용문의 전반부는 '천악신기'의 내용을 언급한 것이고, 후반부는 '신공비사'의 기록을 말한 것이다. 물론 '홍익홍제'는 '홍익인간'과 통하는 가치이며 '신공비사'는 '신지비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철의 '중광가'는 '홍익인간'과 '신지비사'를 한 자리에서 언급한 최초의 자료이다.
선생은 단군의 건국을 실재했던 사실로 생각했으며, 단군시대에 이미 영토・주권・어문・경제와 민족정기를 갖춘 독자적 민족으로 출발했다고 생각했다. 육성교나 대동종교라는 이름하에 인류를 정신적으로 통합할 종교를 구상해 단군을 가장 중요한 지위에 배치했다. 해방 후 환국해서도 단군성적호유회(檀君聖蹟護維會)를 결성(1949)해 단군의 유적을 보존하는 운동에 나서기도 했었다. 이 모두 대종교와 무관치 않다.
이처럼 삼균주의의 역사적 기초에 있어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독립투쟁사 혹은 민족혁명사를 요약하고, 그 전통 위에 삼균주의 혁명의 역사적 요청을 입증해 삼균주의를 혁명이념으로 채택한 한국독립당이나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일에 있었고 그 이론의 바탕에는 이처럼 대종교라는 정신적 배경을 통한 독립투쟁의 당위성 획득과 함께 독립투쟁지도자들의 일체단결을 위한 사상체계가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한평생 독립투쟁에 헌신한 조소앙 선생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이번 칼럼에 실린 사진은 조소앙선생의 손자인 조인래(조소앙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선생으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지면을 빌려 사의를 표합니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전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