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만 동포들과 독립군 부상치료에 힘써
집안은 재산도 많아 숙종에게 하사받은 박동의 대저택 외에 말죽거리에 수십만평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형제는 모든 가산을 처분해 대종교에 독립자금으로 제공한 후 만주로 가서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했다. 여섯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김교준에게 열여섯살 위인 맏형 김교헌은 형이자 아버지였다. 김교준의 호가 '내원'인 것도 형인 김교헌의 호가 '무원'인 것의 영향을 받았다.
김교준 선생은 한국 최초의 양의 양성기관인 대한의학교 제1기생이다. 이후 육군부위(副尉)에 임관됐고, 이듬해 대한의학교 교관이 돼 1910년 일본에 국권이 찬탈될 때까지 군 의무사를 거쳐 정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육군참령 3등군의장(陸軍參領三等軍醫長)까지 승진했다.
1962년 발간된 대한의학협회지 제5권 10호에 따르면, 김교준 선생은 당시를 "양의가 되려는 의도부터 천하게 여긴 시대였으므로 의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동네 사람들의 빈축을 받은 일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로선 명문가 출신의 김교준 선생이 신식 의사가 되기 위해 의학교에 입학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의학교에서 최연소 학생으로 3년을 공부한 김교준은 1902년 7월 5일 5등으로 졸업했다.
1910년 국권이 찬탈되자, 김교준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대종교 교인이 돼 1911년 교단에서 지교(知敎)로 활동하다가 1914년 상교(尙敎)가 됐다. 1917년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총본사가 동만주 지린성 삼도구로 옮겨갈 때 제2대 종사 김교헌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시교에 노력하는 한편 재만(在滿) 동포들의 질병 치료와 독립군의 부상 치료에도 힘썼다. 그러나 만주에 있는 동안 김교준이 벌인 활동(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김교준 선생은 광복을 맞아 귀국해 서울에 남도본사를 세우고 전리로 활동하다가, 대종교 총본사가 환국하자 초대전리 겸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교주 권한대행)가 됐다. 1958년에 도형(道兄) 호칭을 받았다. 1962년 4월에는 제5대 총전교(總典敎)에 선출됐다. 선생의 집안에는 외가를 비롯해 양의학 및 한의학을 전공한 분들이 많고 김교준 선생의 증손자인 김지만도 현재 한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교준 선생 외에도 대종교 활동을 하면서 의학자의 길을 걸은 사람이 또 있다. 바로 한국의학사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일산 김두종(金斗鍾) 선생이다. 그는 1910년 14세에 서울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해 의학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경도부립의학전문학교(京都府立醫學專門學校)에 들어가 학업을 마친 뒤 중국으로 건너가 내과의사로 병원을 개업했다.
1936년 40세에 만주의과대학의 동양의학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들어가 학문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1945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조국이 광복되자 귀국했다. 194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사학을 강의하며 부속병원장을 맡았고 1957년 미국 존스홉킨즈대학 의학사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한국의학사를 연구하고 김규식이 창설한 대한적십자사의 전신인 조선적십자사의 초대보건부장으로 활약하며 부총재까지 역임했다. 1960년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후 과학사학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에 선출됐다.
김두종 선생은 1963년 성균관대학교 재단이사장을 역임하고, 1980년 학술원 원로회원이 됐다. 의학의 기술적 발전과 문화적 의의 그리고 사상적 배경을 중심삼아 의학사를 서술하는 일에 전력해 이 분야에서 길이 남을 금자탑을 세웠다. 한편 서지학자로서도 각종 고서의 간행연대나 판본의 형태, 자체(字體) 등과 그 책에 붙어있는 서(序)·발(跋) 등을 연구해 '한국고인쇄기술사(韓國古印刷技術史)'를 펴냄으로써 서지학 발전에도 크게 공헌했다. 저서로는 '한국의학사(韓國醫學史)'와 '한국고인쇄기술사' 등이 있다. 일산 김두종 선생의 형은 임오교변으로 순국한 대종교 '순국십현'인 설도 김서종 대형으로 1962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받았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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