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스승 나철이 내려준 이름대로 살았다
'보본'(普本) 엄주천(嚴柱天) 선생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본관이 영월(寧越)인 그의 원래 이름은 엄주동이다. 엄주천은 대종교의 나철 대종사가 내려준 교명이다.
엄주천 선생은 1897년 5월 23일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591번지에서 아버지 엄재영과 어머니 김해김씨 사이에서 2남8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그는 191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청진동 223번지에 살았다. 1912년 대종교에 입교한 그를 나철 대종사는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철 대종사는 대종교를 위하고 구국하라는 깊은 뜻을 담아 '엄주천'이라는 교명과 '보본'이라는 호를 그에게 내려줬다.
'주천'(柱天)은 한배님의 기둥이 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보본'은 병일본(並日本)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보본에서 '보'(普)를 두 글자로 나눠서 보면 병일본(並日本)이 되고, 두 글자를 합쳐서 보면 보본(普本)이 된다. 나철 대종사는 엄주천이 대종교와 구국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바랐고 그런 뜻에서 그의 마지막 순명길까지 데리고 간 것이다.
나철의 바람대로 엄주천은 교명과 호에 걸맞은 구국활동을 했다. 대표적인 업적은 1915년 3월 경성고보 교원양성소에 입학해 비밀결사 단체 '조선산직장려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보성중학 동창인 이진석과 함께 이 단체에 가입한 후 서기를 맡았다. 그는 '조선의 혼'을 고취시키고 일본인들에게 빼앗긴 각종 사업을 한국인 스스로 일으킬 수 있도록 역량을 배가시키는 활동을 전개했다.
엄주천 선생은 나철의 순명길을 함께 했다. 나철은 그에게 1916년 음력 8월 4일 구월산 봉행길에 동참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그는 나철 순명길을 시봉(侍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스승 나철의 유서에 따라 유품 일체를 받아 상해로 망명해 예관 신규식에게 이를 전달했다. 이후 그는 신규식 휘하에 들어가 구국활동을 펼쳤다.
1916년 1월, 만주 무송현에서 대종교 종립학교인 백산학교 교장을 비롯해 윤세복-윤필한-이재유-성호-윤창렬 등이 서대령 지역 밀정 여러 명을 1915년 3월과 9월에 두차례 살해한 혐의로 붙잡혀 투옥과 심문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신규식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 정부측 장작림을 만났는데, 이때 엄주천을 수행원으로 동행했다. 신규식 선생이 회담을 통해 18개월간 구금돼 있던 13명의 독립투사들을 석방시키고 교포 700명의 연서가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데 엄주천이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1917년 3월 5일에는 엄주천을 비롯한 '조선식산장려계' 임원과 계원들은 보안법 위반으로 사법조치를 당했다. 이후 엄주천은 중국으로 망명해 대종교 서도 본사(신규식), 총본사(김교헌), 동도 본사(서일)간에 핵심 연락책으로 활약했다. 1921년 8월 28일 서일이 자진 순교하자, 엄주천 선생은 그의 유서를 대종교 총본사의 김교헌 종사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엄주천 선생은 1922년 3월 15일~1923년 2월 28일까지 중국 길림성 연길현 대종교 동도 본사 선리부령을 맡아, 관할 시교당(연길-화룡-왕청-훈춘)을 책임지고 관리했다. 그러면서 군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시내에서 미곡상도 운영했다. 1926년 11월에는 독립군 연락 거점에 대한 밀고로 일정에게 붙잡혀 혹독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하던 중 해방이 되자, 그는 1946년 음력 2월 28일 대종교 총본사가 서울로 환국할 때 함께 왔다. 이후 그는 1946년~1949년까지 대종교 총본사에서 교무행정의 중추 요직인 전리와 전범을 맡았다. 이처럼 엄주천 선생은 스승 나철이 지어준 '보본'이라는 호의 의미를 한평생 충실히 실천한 후 1974년 2월 15일 서울 자택에서 78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선생은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현재 그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전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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