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울리는 '신라면 신화' 만들고 영면
"가족간에 우애하라."
지난 27일 향년 92세의 나이로 영면에 든 '한국 라면의 선구자' 고(故) 신춘호 회장이 임직원들과 유족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의 말이다. 이 두마디 당부에는 그가 농심과 한국 라면을 어떻게 키웠는지, 그리고 그의 삶 자체가 엿보인다.
◇ 일본과 다른 '한국형 라면'으로 승부
고 신 회장의 라면 신화는 1965년부터 시작된다. 그는 1958년 대학 졸업 후 친형인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을 도와 일본에서 제과사업을 시작, 일본롯데의 이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러면서 일본에서 유행하던 라면을 보고 국내에 들여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500만원의 자본금으로 서울 대방동에 공장을 세우고 '롯데라면'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농심의 전신인 롯데공업사의 시작이다.
창업 초기 고 신 회장이 중요시한 것은 '일본 라면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일조할 수 있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를 위해 '독자 기술 개발'에 공을 들였다. 창업 초기부터 일본의 라면을 베끼는 것이 아닌 '라면연구소'를 세워 독자적인 라면을 개발한 것이다.
이는 업계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농심의 연구개발(R&D) 능력의 기반이 됐다. 덕분에 농심에는 히트 상품뿐아니라 꾸준히 잘 팔리는 스테디셀러 제품도 많다. 농심은 1970년대 '소고기라면'으로 승부수를 던진 후 너구리, 육개장 사발면, 안성탕면, 짜파게티, 신라면 등 히트상품을 줄줄이 출시했다. 1991년 국내 1위에 올라선 후 한번도 내주지 않았다. 농심의 2020년 매출은 2조6398억원이다.
해외시장 개척에도 일찍부터 나섰다. "세계 어디를 가도 신라면을 보이게 하라"는 미션을 가지고 수출에 적극 뛰어든 결과다. 1971년 처음 라면을 수출했고, 이후 19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로 영역을 넓혔다. 1981년 라면 종주국인 일본 도쿄에 현지 사무소를 개설했고, 1996년에는 중국 상하이에 첫 해외 공장을 세웠다. 2005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도 공장을 설립했다.
그 성과로 현재 세계 곳곳에서 '농심'을 만날 수 있다.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과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먹는 신라면은 이미 유명한 관광상품이 됐고, 남극의 길목인 칠레 최남단 푼타아레나스에서도 신라면을 맛볼 수 있게 됐다. 농심의 라면 수출액은 2004년 1억달러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9억9000만달러로 10배나 급증했다.
고 신 회장은 '작명'으로도 유명하다. 신라면뿐만 아니라 '깡 시리즈' 등 농심 제품 대부분의 이름이 신 회장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새우깡은 막내딸의 발음에서 착안해 아이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깡을 붙여 시리즈로 만들었다고 한다. '너구리 한마리 몰고 가세요'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 등 여전히 농심을 대표하는 상품의 카피 역시 많은 부분 그의 아이디어로 알려졌다.
◇ 틀어진 형제..."후대는 우애있게 지내길"
고 신 회장의 '한국 라면과 스낵의 성공' 뒷면에는 마지막까지 그에게 아쉬움으로 남은 상처도 있다. 유족들에게 전한 당부인 '가족들끼리 우애하라'는 말에서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형인 고 신격호 명예회장과의 사이가 벌어진 후 끝내 화해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며 후대들은 전철을 밟지 않기 바라는 뜻으로 짐작된다.
고 신 회장은 라면의 국내 사업을 타진하기 위해 형에게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고 신격호 명예회장은 동생의 라면 사업을 강하게 반대했다. 라면이란 제품의 시장성이 크지않고, 특히 라면에 잘 모르는 신 회장이 이 사업에 뛰어드는 것에 대해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고 신 회장은 지난 1999년 자서전에서 "신적인 존재나 마찬가지인 큰형이 반대하자 일종의 오기가 생겼다"며 형의 반대에 마음의 상처가 컸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끝내 형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난 1965년 한국으로 돌아와 농심그룹의 전신 '롯데공업사'를 설립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형제 사이가 멀어졌고, 고 신격호 명예회장이 '롯데'라는 명칭도 못쓰게 하면서 결국 1978년 기업명을 '농심'으로 바꿔 롯데그룹에서 독립했다. 이때 틀어진 두 형제는 결국 생전에 화해하지 못했다.
다만 고 신 회장의 빈소에는 조카이자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아들들인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화환이 놓여있다. 이들은 조문하지 못한 것은 코로나19라는 특수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둘 다 현재 일본에 체류중으로 자가격리 등을 감안하면 조문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지난해 1월 고 신격호 명예회장이 별세했을 때에는 고 신 회장의 아들인 신동원 농심 부회장과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이 빈소를 지켰다.
재계 한 관계자는 "사업적인 시각차로 인해 형제가 반세기동안 반목하며 지냈지만 고 신춘호 회장의 마지막 당부를 보면 아쉬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며 "사촌간인 신동빈 회장과 신동원 부회장은 친밀한 사이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선대의 갈등은 당사자들이 모두 가지고 갔다고 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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