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에너지 축소 없이 안전기준 부합해야
유럽연합(EU)이 원전을 '녹색에너지'로 분류한 것을 두고 원전 확대가 세계적 정책기조라는 정부 입장 표명은 수박 겉핥기라는 지적이다. EU가 달아놓은 까다로운 조건은 무시하고, 단순히 '원전이 녹색에너지에 포함됐다'는 내용만 가지고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홍보하려 한다는 것이다.
최근 유럽의회는 원전을 '택소노미'에 포함하기로 최종 의결했다. 택소노미는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녹색' 경제활동으로 인정되는 목록을 담은 분류체계다. EU의 기후 및 환경 목표에 맞는 민간투자 목적의 경제활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과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이같은 EU의 결정에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7일 성명을 내 "EU를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원전의 활용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산업부는 지난 5일 정부가 2030년까지 원전 비중을 30% 이상으로 확대하겠다는 내용의 '새정부 에너지 정책방향'이 지난 정부의 탈원전 중심 '에너지 전환 로드맵'을 공식적으로 대체한 것도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부합한다는 입장이다.
◇ 재생에너지가 우선, 원전 까다로운 조건 붙어
하지만 유럽연합 금융서비스 최고위 위원 메어리드 맥기네스(Mairead McGuinness)는 택소노미 최종안 표결을 앞두고 유럽의회 본회의 개회사에서 "택소노미는 '에너지 정책'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기후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민간 투자자들을 안내하는 자발성에 기초한 도구"라면서 "원전 투자는 EU 회원국에 지워지는 책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재생에너지 투자의 확대이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원전을 늘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실제로 택소노미에는 몇가지 단서조항이 따라붙는다. 무조건적으로 원전의 친환경성을 인정하기보다 과도기적 대안으로서의 역할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원전이 '녹색' 지위를 인정받으려면 2045년 이전에 건설허가를 받아야 하고, 2025년까지 사고저항성 핵연료 적용, 2050년까지 고준위폐기물 처분장 운영계획, 최신기술 적용 재난대비 안전조처 마련 등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때문에 원전업계에서는 '혹 떼려다 혹 붙였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다. 특히 사고저항성 핵연료는 실험단계에 있을 뿐, 핵연료 실험의 횟수와 기간, 핵연료개발이후 원자로내 열수력코드 개정, 각각의 인허가절차까지 감안할 때 상용화 여부 자체도 불확실하다. 게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체르노빌 및 자포리치아 원전에서 군사적 교전이 발생하면서 새로운 안전규제 도입으로 비용이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 원전, 경제성도 재생에너지보다 떨어져
이전부터 유럽과 미국 전력시장에서 신규원전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한층 강화된 안전규제와 이로 인한 만성적인 건설공기지연, 치솟는 건설비용으로 인해 투자 불확실성이 여전히 크다. 최근 준공됐거나 건설중인 대표적인 유럽의 원전들은 핀란드 올킬루토-3, 프랑스 플라망빌-3호기다. 이들 대부분은 건설공기가 15년에 육박하며, 건설비용은 애초보다 2배를 넘고 있다.
원전확대를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이던 프랑스조차 유럽의회의 택소노미 가결 직후 프랑스전력공사의 완전 국영화 방침을 발표했다. 현재 프랑스에는 12기의 원전에서 냉각배관의 부식균열이 발견돼 1년여의 시간이 소요되는 정밀검사와 설비교체를 위해 가동을 중단시킨 상태다. 이에 따라 프랑스 도매전기요금은 6일 기준 381유로/MWh(507원/kWh)에 이르는 수준으로 올라있다. 이는 주변 유럽국가들 대비 2배에 가까운 요금수준이다.
2007년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의 일원으로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한 미국 델라웨어대학교 바이든스쿨 기후정책학 존 번(John Byrne) 석좌교수는 "원전의 균등화발전원가(LCOE)는 70달러선인데 비해 태양광은 47달러수준"이라며 "지난 20년간 미국에서는 신규 원자력발전소가 준공되지 않았는데, 사고 위험 뿐 아니라 경제성 논리에서 밀린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 K-택소노미에도 원전 넣을 듯…EU 수준 조건 없으면 '무용지물'
환경부는 EU의 선례를 따라 원전을 추가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 'K-택소노미' 초안을 8월께 발표할 예정이다. 그런데 한화진 환경부 장관은 "우리나라와 EU는 상황이 다르다"며 규제수준이 완화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하지만 국내 신규원전은 택소노미 단서조항으로 제시된 사고저항성 핵연료, 2050년 핵폐기장 운영계획, 최신기술 기준적용은 물론 지난 2009년 유럽 원자력공동체조약이규정한 극한 재난대비 안전조치, 항공기충돌 대책조차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원전이 K-택소노미에 포함되더라도 EU 택소노미의 원전 금융지원 조건에 부합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국내 기업들이 유럽으로 수출하는 발전설비들이 많은데 유럽 수준의 조건이 없는 국내 원전의 K-택소노미 포함은 국제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국내 홍보용이라는 것이다.
김지석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전문위원은 "EU회원국 중 이미 재생에너지 전력 비중을 30-40% 이상 달성한 나라들이 많으며, 독일의 경우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전력을 80%까지 높이기 위해 법 개정을 추진 중일 정도로 적극적이다"고 강조하면서 "우리나라는 이번 택소노미 결정과는 별개로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안보 강화는 물론 국내 수출기업의 RE100 대응을 위해 필수적인 태양광,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의 빠른 확대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김 위원은 이어 "원자력은 2021년 국내 발전량의 27.4%를 차지했는데 이는 전 세계 원자력 발전 비중 9.9%의 세 배 수준이다. 이미 높은 원전 비중을 더 높이려고 한다면 EU 그린 택소노미 기준에서 제시된 사고 저항성 핵연료 사용과 고준위 핵폐기물 저장시설 확보 등 안전 기준을 먼저 강화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결정으로 유럽에서 원자력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처럼 해석하거나 홍보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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