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멈춤'을 명령하고 혼자있는 시간필요
"구원은 연이은 재앙의 작은 틈바구니 속에 버티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발터 벤야민의 말이다. 우리는 구원이란 미래의 어느날 마침내 실현하는 이상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원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어떤 틈과 공백에서 우연히 열리는 사건처럼 찾아온다. 메시야적 순간은 나의 삶 속에 비밀처럼 숨어있다. 행복한 순간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 꽃처럼 개화한다. 재난과 고통의 틈 속에도 구원은 출구를 찾으며 기다리고 있다.
◇ 나의 세 가지 방
나에게 몇 개의 소중한 방이 있다. 나를 구원하는 공간이다. 이 방에 들어가는 것이 나의 행복이자 즐거움이다.
그 첫 번째 방은 '책방'이다. 이 방은 나의 보물창고이다. 책갈피를 넘기며 글을 읽으면서 나는 고요해지고 점점 충만해진다. 거기에서 아름다운 이야기와 깊은 지혜와 사람의 향기를 만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 깨닫는 기쁨,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 언어의 춤이 조성하는 아우라에 접하는 황홀이 거기에 있다. 허리를 굽혀 진리를 줍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때로는 저자와 거세게 논쟁한다. 책 속의 글귀 하나를 붙잡고 상상의 날개를 펴기도 한다. 책방에서 나는 글을 쓰기도 한다.
두 번째 방은 '다방'이다. 사람을 만나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자리다. 카페나 공원이나 어디든 다방이 된다. 이 방에서 나는 타자와 조우한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한다. 대화를 하고 서로를 경청한다. 눈빛이 오가고 숨결을 나눈다. 서로의 삶의 스토리를 이야기한다. 삶도 나누고 아픔도 공유한다. 옛날에는 나는 내 이야기를 할 줄 몰랐다. 나를 꾸미려고 애쓰고 완벽하게 보이려고 쇼를 하곤 했다.
이제는 다방에서 나는 망가질 줄 안다. 나의 삶의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말한다. 실수와 오류로 가득 찬 과거도 털어놓고, 미화할 수 없는 행동이나 비밀도 살짝 보여준다. 내 삶을 격동시킨 사건들과 기억들도 이야기로 펼쳐놓는다. 나의 삶 전체가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함과 불연속성으로 가득하다는 걸 인정하자 대화가 무척 편해졌다. 다방은 살아있는 책방과도 같다. 여기서 나는 타인의 삶과 사유를 접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전수받는다. 다방에서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시간의 향기가 깊어지는 다방에서 나는 다정한 사람이 된다.
나의 세 번째 방은 '골방'이다. 골방에서 나는 홀로 있는다. 골방은 폐쇄된 물리적 공간을 뜻하지 않는다. 모든 것과 단절된 자리, 홀로 머무는 곳이면 어디든 골방이 될 수 있다. 흔히 골방은 명상이나 기도의 자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골방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do nothing). 묵상이나 사색이라는 행위조차 하지 않는다.
어둠 깊은 곳의 흑암에 머문다. 눈을 감고 바라본다. 빛이 열리고 빛을 본다. 이 방에 마침내 도달하면 나는 나를 발견한다. 날 것의 내 모습도 보이고, 내 속에 일렁거리는 분노와 슬픔도 목격한다. 나의 일그러진 얼굴도 바라본다. 골방에서 내게 작은 변화가 일어나곤 한다. 내면의 연금술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장소가 바로 골방이다.
책방과 다방과 골방이 있기에 나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여러 활동들을 한다. 거리와 광장과 노동의 현장에서 쓸모 있는 일을 하려 애쓴다.
◇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보자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모로코 여행 장면을 보았다. 모로코의 한 전통시장이다. 그날은 비가 내린다. 그래서 시장에는 손님의 발길이 뜸하다. 장사가 잘 될 리 없다. 그런데 상인들은 싱글벙글 밝은 얼굴을 하고 있다. 여행자가 물었다.
"비 때문에 손님이 없는데 괜찮나요?"
상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비는 신의 축복이라서 기뻐합니다."
"장사가 안 되는 것보다 비 때문에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이 더 크기 때문에 상관이 없습니다."
건조한 지역이기 때문에 모처럼 내리는 비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후특성과 무관하게 빈자리를 지키며 미소지으며 살아가는 그 삶의 방식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을까? 속도강박 사회의 주술에 빠져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려가고 있다. '돈'이라는 절대신을 숭배하며 '생산성'이라는 시대적 구호에 따라 마구 질주한다. 그 결과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전부 반납해 버렸다. 잠시 멈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 삶을 바라볼 여백이 가질 수 없는 걸까? 친구들을 만나 차를 마시고 온갖 이야기와 잡담과 농담도 나누고, 한가한 산책도 하며 자연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면 삶이 얼마나 더 풍성해질까?
"다른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곳, 거기서 나는 멈춰 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 중 하나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이다. 이 말은 다의적인 울림을 준다. 사유나 이론의 유행에 빠지지 않는 일, 시대의 급류에 포획되지 않는 자유, 무리에 휩쓸리거나 정치적 광기에 말려들지 않고 유행에 감염되지 않는 정신을 말하는 듯하다. 일종의 판단중지이기도 하다. 섣불리 결론내리지 않고 물러서서 깊이 사유하고 성찰하는 태도이다. 멈춤 혹은 정지하는 힘이 있을 때 휩쓸리지 않는다. 멈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 자신에게 '스톱'이라고 말하기
이런 멈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스톱'(stop!)을 명령하고 스스로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면 된다. 책 읽는 시간, 사색이나 기도의 자리, 함께 공부하는 모임,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만남과 대화, 문화예술적 경험, 산책이나 여행 등이 그것이다. 사실 이런 멈춤은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일을 하고 있고, 연결과잉 상태에서 살고 있어서 단절을 마치 죽음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시간은 진정 자신이 되는 시간이다. 회복의 시간이자 자기 발견의 자리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머무는 공간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뚜렷한 이익도 없고 그리 쓸모가 없어 보이는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얻게 된다.
고독(solitude)은 결코 외로움(loneliness)의 상태가 아니다. 멈춤의 힘과 고독의 신비를 아는 자는 종종 독거를 선택한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힘주어 말하고 싶다. 내밀한 골방과 책방을 가진 이는 다방의 대화가 보다 풍성하고 현장의 활동 역시 생기발랄하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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