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 체계화한 '신단실기'와 '신단민사' 저술
김교헌 선생은 1867년 7월 5일 경기도 수원에서 부친 김창희와 모친 풍양 조씨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그의 7대조 김주신(1661~1721)은 숙종의 장인이다. 아버지 김창희는 공조판서였고, 어머니는 판관을 지낸 조희필의 딸이다. 그는 집안의 종손으로, 영조때 하사받은 340칸 대저택에서 대대로 살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결심하면서 그는 모든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쾌척했다. 그가 살던 340칸 대저택은 조계사가 인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은 18세 되던 해인 1885년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했다. 그 후 권지부정학(權知副正學)·예조참의(禮曹參議)·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성균관전적·홍문관부교리·시강원문학·홍문관응교·수찬·성균관대사성·승정원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이 좌절되면서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되자 대표위원으로 선정되어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했다.
1903년에는 문헌비고찬집위원(文獻備考纂輯委員) 편집위원이 됐다. 그는 이곳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고 지식을 넓히게 됐다. 선생이 5년에 걸쳐 완성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는 상고시대부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각종 제도와 문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1906년 그는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 판사와 동래부사로 재직하면서 항일의식이 고취된 것으로 여겨진다.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다가 일본인들의 횡포와 친일파 송병준의 모함으로 해직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과 교유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광문회에 들어가 현채·박은식·장지연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복직돼 1909년 규장각부제학으로서 국조보감감인위원 가선대부까지 승진했다. 선생은 규장각부제학으로서 '국조보감' 감인위원을 겸직했는데 '국조보감'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善政)만을 모아 후세의 왕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편찬한 편년체 역사책이다.
그는 1909년 1월 15일(음력) 나철·오기호·이기 등과 서울 제동에 모여 단군교를 '중광'(重光, 교문이 다시 열림)했다. 단군교 중광에 참여한 인사로는 강우·최전·유근·정훈모·김인식·김윤식 등 수십명이었다. 주로 나철과 함께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한 인사들과 을사오적 처단의거에 참가했던 인사들이었다. 단군교는 다음해인 1910년 8월 5일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고 포교활동을 통해 구국운동에 본격 나섰다.
김교헌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했다. 대종교는 1910년 8월 5일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교명을 바꿨다. 단군교는 1909년 1월 15일(음력) 나철·오기호·이기 등이 서울 제동에 모여 '중광'(重光, 교문이 다시 열림)된 민족 종교였다. 중광에 참여한 인사는 강우·최전·유근·정훈모·김인식·김윤식 등 수십명이었다. 주로 나철과 함께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한 인사들과 을사오적 처단의거에 참가했던 인사들이었다. 김교헌 선생은 대종교에 입교한 후 이름을 외자 헌(獻)으로 바꿨다.
대종교 1대 교주인 홍암 나철 선생은 훌륭한 자질과 관직경력까지 갖춘 김교헌 선생을 각별히 신임했다. 선생은 입교 다음해인 1911년 총본사 요직을 거쳐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의 중책을 맡아 4년간 직무를 수행했다. 유근과 함께 '단군의 사적을 살핀다'는 뜻의 단군 기록모음집 '단조사고'(檀祖事攷, 1911) 편찬을 주도하기도 했다. 1914년에 남도본사 전리, 1915년에 남도본사 도강사 및 전강 등 중책을 맡으면서 종리(倧理)와 종사(倧史)를 연구하던 중 1914년 '신단실기'(神壇實記)와 '신단민사'(神壇民史)를 저술했다.
'신단실기'는 대종교 종리에 관한 책으로, 단군을 종조로 내세워 민족종교의 교리와 단군사를 밝힌 것이다. 산단실기는 비록 일제에 나라는 강탈 당했지만 우리에게는 유구한 민족의 시조가 있고 민족사가 있으며, 민족의 고유한 종교가 있다는 것을 밝힌 종교서이자 민족혼을 일깨우는 국사서였다.
'신단민사'는 △상고(上古) - 신시시대, 배달시대, 부여시대, 종교, 제도, 문학기예, 풍속 △중고(中古) - 열국시대, 남북조시대, 종교, 제도, 문학기예, 풍속 △근고(近古) - 려요시대, 려금시대, 고려시대, 종교, 제도, 문학기예, 풍속 △근세(近世) - 조선시대, 종교, 제도, 문학기예, 풍속 등으로 나누어 시대구분을 했다. 김교헌은 근고에 요금(遼金)도 포함시켰다. 이는 만주를 우리 영역 즉 구강(舊疆)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민족사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체계화했다.
이 두 서책은 우리의 건국시조인 단군과 대종교를 연결시켜 그 연원(淵源)을 역사적으로 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세워 종래의 사대주의 사상을 불식하고 민족주체 사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의 학문은 후에 박은식·신채호의 민족사학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최남선도 그에게 사사(師事)했다. 김교헌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그의 서적 대부분은 최남선이 갖고 있었고, 지금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글/ 민인홍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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