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에 민족학교 설립해 독립운동가 육성
'밀정'에 등장하는 독립투사들의 본거지였던 '용정'은 두만강 건너 만주벌판에 위치한 곳이다. 윤태영이 작사한 가곡 '선구자'에도 등장한다. 일송정, 용두레 우물, 해란강 등 듣기만 해도 가슴 저미는 이름들이다.
'용정'은 일제강점기, 셀 수 없이 많은 전설과 아픔과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이기도 하다. 용정에는 독립투쟁의 대부이자 대종교인이었던 보재 이상설(1870-1917) 선생이 세운 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과 '대성중학교'가 있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충북 진천 출신으로, 1894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27세에 성균관 관장을 지내셨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대 총장에 해당한다. 이상설 선생은 일찍부터 우당 이회영 선생 등과 함께 신학문을 공부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후 연해주로 망명했다가 용정으로 옮겨 1906년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은 1907년 이상설 선생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석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일제 탄압에 못이겨 그해 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서전서숙은 만주에 세운 우리 민족교육의 효시였던 까닭에, 이후 간도지역에서 설립된 많은 민족학교들은 서전서숙의 영향을 받았다.
다시 연해주로 돌아간 이상설 선생은 그곳에서 1914년에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일제강점 후 최초의 망명정부다. 그러나 이상설 선생은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운지 3년뒤인 1917년에 연해주에서 안타깝게 사망했다. 향년 47세였다. 도마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하던 분이셨다.
서전서숙의 옛터에는 현재 조선족 학교인 '용정실험소학교'가 들어서 있다. 이곳이 서전서숙의 터였다는 것은 비석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국인에게는 학교를 개방하지 않아서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학교 안에 이상설 정자도 있다고 한다. 지금 중국은 윤동주 시인을 조선족으로 둔갑시키는 등 동북공정과 한복공정, 김치공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집요하게 하고 있다.
이상설 선생이 설립한 대성중학교는 용정에 있던 6개 중학교가 통합한 학교로 당시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고, 시인 윤동주도 이 학교 졸업생이다. 지금도 존속하는 이 학교는 현재 구관과 신관으로 나눠져 있다. 구관에 이상설 관련 자료가 전시된 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 밖에는 윤동주 시비와 상이 세워져 있다.
이상설 선생을 포함해 반일투쟁을 가장 치열하게 벌였던 사람들 대부분이 '대종교' 교도였다. 대종교는 1909년 나철 선생이 단군교를 중광(重光,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한 민족종교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독립전쟁사에서 찬란한 승리를 거둔 봉오동과 청산리 대첩의 실질적인 지휘부와 북로군정서의 군사들이 대종교 교도였다.
나철, 김교헌, 서일, 윤세복,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이범석,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이상룡, 김동삼, 신규식, 이시영, 박찬익, 정인보, 주시경, 조소앙, 이회영 선생 등이 모두 대종교 교도였다.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대종교 교인은 약 1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홍암 나철(弘巖,羅哲 1863-1916) 이후 2대 종사 무원 김교헌(茂園 金敎獻, 1869-1923), 백포 서일(白圃 徐一, 1881-1921) 등 세 분을 모신 삼종사의 묘역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용성향에 있다. 이 묘역은 중국 지방문화재로 등록돼 있어, 유해 봉환을 하기 어렵다.
지금은 거의 잊혀지다시피한 대종교는 최근 교육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교육이념 '홍익인간' 삭제) 철회운동을 벌이면서 조금이나마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이제부터 처절하고 치열했던 대종교의 항일독립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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