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박사' 이태룡이 말한 '우리가 몰랐던 의병이야기'
"외세가 침략했을 때마다 나라를 구한 것은 '의병'(義兵)이었어요. 일제시대에 반일투쟁을 벌였던 의병들은 30만명이 넘는데 교과서에 실린 인물은 고작 10명 정도입니다. 220쪽에 달하는 역사교과서에서 의병관련 분량은 달랑 1쪽 정도 될 겁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의병 연구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증거죠."
35년 넘게 '의병' 연구에 매달리고 있는 이태룡(65·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박사가 한탄하며 내뱉은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전국의 의병을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받은 몇 사람 가운데 이태룡 박사만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또 그가 2014년에 출간한 '한국 의병사'도 우리나라 의병에 대한 역사를 기술한 유일한 책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의병에 대해 연구를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860개의 인용저서 페이지까지 달아놨지만 아직 후속 서적은 단 한권도 없다.
그러다보니 그는 의병 연구를 멈출 수가 없다. 그동안 수십년간 혼자서 의병을 발굴하다가, 지금은 지난해 4월 출범한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소장으로 있으며 의병 발굴에 집중하고 있다. "40개 국립대학교 중에서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이를 포상신청하는 대학은 인천대학교가 유일하다"고 말하는 이태룡 소장은 "모든 국립대학교가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조직이 있었으면"하는 바람을 드러냈다. <대담=윤미경 편집국장, 촬영=김민우, 조인준>
"특사로 순국한 이용익 선생, 일자무식으로 폄훼"
수십년전 방영했던 드라마에서 이용익 선생을 보부상 출신의 일자무식꾼으로 폄훼한 내용이 나오더라. 기가 막힐 일이다. 이용익 선생은 광무황제(고종) 시절 무과에 급제한 분이고,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 분은 광무황제의 특사를 두번이나 한 사람이다. 1906년 러시아 황제를 만나기 위해 중국과 홍콩을 거쳐 프랑스로 들어갔는데 프랑스 호텔에서 일제 앞잡이 칼에 13군데나 찔렸다. 러시아 황제가 이 사실을 알고 넉달간 병원에서 치료받도록 배려해줬다. 1907년 두번째 특사로 갔을 때 블라디보스톡에서 독살을 당했다.
당시 광무황제 실록에 '나라를 위해 애쓰다 갑자기 죽게 됐으니 참으로 슬프다. 직접 조문을 쓸 것이고, 시호를 내리게 할 것이다'라고 나와 있다. 그렇게 내린 시호가 '충숙공'이다. 그런데 역사책 어디에도 이런 내용이 없다. 나라를 위해 순국한 사람인데 후손이 20년전 서훈을 신청하니까 서울대 한 교수는 '조선시대 사람 아니냐, 친러파다' 이러면서 서훈을 거절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용익 선생뿐만 아니다. 내가 1986년부터 의병 연구를 시작했는데 국사·근현대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조차 포상이 안된 경우가 많더라. 일본 군경에 잡혀서 교수형을 받거나 징역형을 받은 판결문까지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2008년에 이 분들부터 포상신청을 하기 시작했다. 의병장과 의병 등 828명을 신청했다. 일제가 남긴 1000쪽이 넘는 판결문을 뒤져서 3년 이상 징역형을 받은 사람만 추렸는데도 828명이나 됐다.
이후에도 의병 발굴을 꾸준히 진행해 지난해까지 4000여명을 발굴해 포상신청했다. 인천대에 와서 포상신청한 분들만 지난해까지 2060명이다. 이 분들 중 1209명을 심사해 149명이 포상됐다. 이번 삼일절에도 연구소에서 신청한 분들 가운데 68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다.
"송도고보 600명 재학생 중 300명 잡혀가"
송도고등보통학교(송도고보) 출신 97명도 발굴했다. 97명 중에 11명은 이미 서훈을 받았고 13명은 지난번 서훈신청을 했다. 이번에 추가로 73명에 대해 서훈신청할 예정이다. 송도고보는 1906년 개성에서 '한영서원'으로 개교했다가 1917년 송도고보로 명칭을 바꿨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2년 인천으로 피교했고, 현재는 송도고등학교다.[편주]
송도고보에 주목하게 된 것은 사건마다 송도고보 학생들이 연루돼 있어서다. 좀더 조사해봤더니 세번의 굵직한 사건이 있더라. 첫번째는 1915년 '한영서원 창가집 사건'이다. 당시 악대부 교사들이 창가집을 애국가사로 개사해 학생들에게 가르치다가 들통나서 교사와 학생 28명이 석달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교사와 교직원 5명은 1년에서 1년6개월 징역을 받았고, 학생들은 퇴학당했다.
두번째는 1930년과 1932년의 '만세시위'와 '개성격문 사건'이다. 1929년 광주학생시위가 개성으로 번지면서 1930년에 송도고보 학생 대다수가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했다. 이 사건으로 600명 정원 가운데 300명이 잡혀갔고 정학을 당했다. 이후 1932년의 개성격문 사건은 일본의 만주점령으로 독립운동 터전을 잃게 되자 송도고보 재학생과 송도고보 출신의 신문기자 등 지식인들이 벽보를 붙이며 반제국주의 운동을 시작한 거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조합을 결성해 일제에 대항했다. 이 사건으로 끌려간 학생들은 50일동안 매를 맞았다. 재학생들은 면소 또는 기소유예됐지만 졸업생들은 2~3년씩 징역살이를 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돼서 송도고보 출신중에 일본으로 유학간 사람들이 일본에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반제국주의 운동을 벌였다. 1934~1938년 사이다. 당시 대표적인 인물이 윤재환 의사다. 윤재환 의사는 송도고보 재학당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고, 일본 도쿄대 유학시절 조선인유학생회를 결성해 반제국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또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사람이 초주검 상태가 되니 일본 경시청이 병보석으로 풀어줬고 적십자병원에서 치료받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당시 일본 적십자병원의 치료기록을 입수하기 위해 편지도 보내고 이메일도 보내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랬더니 마지못해 병원기록은 5년만 보관한다면서 '확인해줄 수 없다'는 병원장의 도장이 찍힌 확인서가 오더라. 그걸 국가보훈처에 제출하고 서훈을 신청했더니 입증할 서류가 없어서 안된다고 하더라. 보관된 서류가 없는데 어떻게 증빙하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골함에 날짜도 있고, 족보에도 있고, 재직등본에도 있는데. 일본의 비밀기록에 다 나오는데(한숨). 윤재환 의사도 지난해 8월에 다시 신청했다.
"반민특위 해체되자, 경찰이 진주법원 불태워"
일제강점기에 진주 경찰이었던 '하판락'은 주사기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잡아간 독립운동가 혈관에 주사기를 꽂아 피를 뽑은 다음에 부인 얼굴에 뿌리는 식으로 고문한다. 어떻게 견디겠나? 일제경찰 노덕술은 의혈단장 김원봉을 꿇어앉히고 뺨을 때리는 등 아주 악랄했다. 이외에도 의병장을 족치다 안부니까 부인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서 거꾸로 매달아놓고 고춧가루물을 먹이는 고문도 서슴치 않았다.
일제 후반에 의병들은 주로 덕유산과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했기 때문에 진주 지역은 특히 독립운동가 활동이 많았다. 임시정부에 돈을 대준 사람이 6000명인데 진주와 하동, 고성 등 경남 사람들이 4000명이나 됐다. LG 가문은 집구석이 망할 판인데도 두차례에 걸쳐 쌀 500가마니를 냈다.
그러니 진주지방법원에 독립운동과 관련된 재판기록이 얼마나 많았겠나? 그런데 1949년 화재가 나면서 모두 불탔다. 그러면서 하판락 등 경찰의 악랄한 고문기록도 모두 사라졌다. 화재 당시가 새벽 2~3시쯤인데 50~60명이 인민군 복장을 하고 인민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면서 돌아다녔다고 한다. 당시 국회조사단이 철저히 조사한 끝에 '경찰이 불을 질렀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가 직접 조사해보니 1909년 2~3월에 걸친 한달간 일본군 연대장이 직접 나서서 지리산 의병 토벌에 나섰더라. 그때 사망한 의병이 772명이고, 부상당하거나 포로가 된 의병이 2200명쯤 되더라. 당시만 해도 이들에 대한 재판기록은 모두 남아있었다. 그런데 친일파의 민족반역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1948년 설립된 '반민족 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1949년 8월에 해체되자, 지방법원에 남아있던 재판서류 원본들을 모두 없애야 했던 거다.
들통나면 안되니까 경찰들을 시켜서 화재를 낸 거다. 서훈을 받은 의병 2671명 가운데 경북 전남 전북 출신이 600명인데, 경남은 54명뿐이다. 화재로 기록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지에서 활동하다가 잡힌 기록을 근거로 경남출신 의병 411명을 제가 2019년 1월에 포상 신청했다. 진주법원 화재조사를 맡았던 이강우 국회의원은 6.25때 행방불명됐다. 하판락은 해방되고도 경찰노릇을 계속했다. 도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다. 노덕술도 해방후에 경찰 고위직까지 했다. 반민특위 관련서류는 그대로 이관돼 아직도 있지만 어떤 정부도 이걸 안뒤지고 있다.
"반일투쟁한 의병 30만명···교과서엔 1쪽뿐"
1907년 12월~1908년 12월까지 13개월동안 전국에서 발생한 독립활동은 1971건이다. 일본경찰이 기록해놓은 것만 그렇다. 우리 민족은 나라를 뺏기지 않으려고 이렇게 치열하게 싸웠다. 전세계 유례가 없을 정도다.
일본 입장에선 '폭도'지만 우리 입장에선 '의병'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경찰이 남긴 활동일지 '폭도에 관한 편책'은 무려 122권에 달한다. 이 가운데 6만쪽이 의병에 대한 내용이다. 의병 재판기록만 1500건이다. 이외에도 일본군과 일본 외무성 기록, 주한 일본공사 기록 그리고 의병장이 남긴 일기 등을 뒤지면 묻혀있던 의병들을 찾을 수 있다.
당시 활동했던 의병 수는 대략 3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15만명이 부상당하거나 죽었다. 서훈을 받은 의병은 2671명뿐이다. 교과서에 실린 의병은 고작 10명 정도다. 나는 문학도다. 그런데 의병에 대한 역사를 기술한 책은 내가 출간한 '한국 의병사'가 아직도 유일하다. 일본 역사책은 1000여종에 달하지만 우리나라는 100여종밖에 안된다. 의병이나 3·1만세의거에 대해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다섯손가락에 꼽힌다.
제가 2013년에 야마구치여자대학의 데라우치문고를 방문한 적이 있다. 데라우치문고는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우리나라에서 강탈해간 문헌 15~20만권이 소장돼 있어서 찾아갔다. 그런데 내가 3번째 한국인 방문자더라. 이전에 경남대학교가 두차례 방문한 것이 전부였다. 경남대는 1995점을 50년 대여형식으로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당시 빼앗아간 가치있는 한국문헌들은 모두 일본 왕실도서관에 지금도 소장돼 있다.
드넓은 갯벌을 무턱대고 판다고 조개가 나오나? 의병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의병을 발굴할 수 있다. 그들이 나라를 뺏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쳤는지 알아야 한다. 국가보훈처도 행정공무원이 아닌 연구원 중심으로 바뀌어야 의병을 발굴할 수 있는거다. 국가기관 외에도 국립대학교에서도 발굴연구를 해야 한다.
고조선 시대부터 외침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민병이 되어 나라를 구한 것은 의병이다. 그런데 국사교과서 220쪽 가운데 의병에 대한 내용은 온전히 1쪽이 될까말까 하다. '이강연'은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인데 경북으로 표기해놓는 등 그나마 교과서에 실린 10여명의 의병 활동지역도 틀리게 해놨다. 의병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삶과 관련된 것인데 적어도 국사교과서의 10%는 차지해야 되는 것 아닌가?
이제는 '악'만 남았다. 늘 책속에서 왜놈들하고 싸우니까, 눈에 핏발이 서고 인상도 안좋아지고.(웃음) 지금까지 포상이 된 독립운동가는 1만6410명이다. 해방된지 76년이다. 이 의병들이 독립운동을 한지는 120년전이다. 앞으로 10년안에 10만명을 더 발굴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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