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숙의 토닥토닥] 아이에게 받은 임명장

김향숙 작가, 교육자, 前 혁신학교 교장 / 기사승인 : 2024-06-25 08: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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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날 초등학교 제자에게 받은 토기 임명장

다사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자 내 삶의 지표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자유시간이 되면 학교 구석구석에서 문제 행동을 한다. 휴대폰을 몰래 보기도 하고, 금지된 공간에서 놀다가 들킨다. 서로 잘 어울리는가 싶다가도 다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자유시간이 오히려 규칙 위반하는 아이를 많아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시간에 아이들을 받아줄 공간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상황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그래서 내 방을 '다사랑방'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내어줬다. 모두가 '다' 올 수 있고, 누구나 다 '사랑'하는 방이다. 교장실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다는 입소문을 타고 학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신나는 놀이감이 없다고 발길을 돌린 아이들도 있었지만 늘 붐볐다. 

이곳을 찾는 학생들은 담임의 손길이 섬세하게 미치지 못하거나, 또래와 어울리기 어려운 외톨이가 많았다. 별다른 시설없이 둥근 탁자와 매트, 책 몇 권, 스케치북과 게임기 한두 개가 전부였다. 이 방에서 나는 학생들을 맞이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음대로 책을 읽거나 그림 그리기, 게임이나 놀이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보채기도 하고, 큰아이는 참견이 귀찮은 듯 구석에서 자기가 하는 일에 몰두한다. 좌충우돌 자유로운 분위기, 이것이 다사랑방의 색깔이다. 수업종이 울리면 하나 둘 아이들이 떠나간다. 다시 찾아오겠다는 암묵의 약속을 남긴 채.

2학년 때부터 자주 오는 꼬마가 있었다. 외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누구와도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하루에 서너 번씩 다사랑방에 찾아온다. 쉬는 시간, 방과 후 그리고 집에 가기 전에 들른다. 그 아이는 내 방에 있는 모든 물건에 관심이 많다. 이 물건은 어디에 쓰는 것이며, 왜 필요한지 묻는다. 특히 하얗고 둥근 도자기를 좋아한다. 안과 밖을 자세히 보다가 톡 두들기며 소리를 듣기도 한다. 가끔 그것을 따라 그린다. 나의 설명을 알아들을 때면, 가늘어진 눈가로 번지는 미소가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다. 나는 그 표정이 좋아서 자꾸 말을 건다.

내가 업무에 바쁘면 꼬마는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리기를 좋아하더니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아왔다. 나는 아이에게 마치 대회장에서 주는 것처럼 상장을 읽어 주었다. 꼬마가 상장을 다사랑방에 두고 싶다고 한다. 보육원에서 지내고 있으니 둘 곳이 마땅치 않나보다. 나는 잘 보이는 곳에 상장을 걸어두고 학생들과 동료들 시선을 받도록 했다.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그 상장은 내 방을 빛냈다.

5학년이 되자 "교실에서 보내는 자유시간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이 들려주는 기타소리가 너무 좋아서 방과후 기타교실에 들어가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가 스스로 하고 싶은 걸 발견해 무척이나 기뻤다. 아이가 기타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래도 아이는 집으로 돌아갈 때면 잊지 않고 들린다. 하루도 빠짐없이.

다사랑방 창 너머로 남학생의 머리가 보인다. 문을 열자 그 아이가 신문지에 싼 것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들고 있다. '아, 문고리를 잡을 손이 없었구나!' 들어오자마자 가지고 온 것을 내 책상 위에 놓고 신문지를 벗기기 시작한다. 그 형체가 드러나자 그것을 집어 들고 내게 내민다. "선생님, 제가 드리는 임명장이에요. 내일이 스승의 날이잖아요."

토기였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을까. 적당하게 반죽된 진흙이 도자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손잡이도 적당한 곳에 자리잡았고 뚜껑도 있었다. 표면에는 '임명장'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나는 정중하게 자세를 가다듬고 임명장을 받았다. 아이는 내 이름을 부르고 내용을 설명하고 축하 박수도 쳤다. 나는 초등학생이 주는 임명장을 받은 선생님이 되었다. "이것만큼 소중한 선물은 없을 거야. 오래오래 간직할게."

그 진흙 임명장은 이제 우리 집으로 왔다. 내 방에는 두 개의 도자기가 있다. 하나는 작품 같은 도자기이고, 다른 하나는 누런빛을 띤 작은 토기다. 친구가 준 도자기는 나에게 은근히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진흙으로 만든 기우뚱한 것은 내 마음을 벅차게 만든다. 날마다 나는 이 조촐한 토기 앞에 걸음을 멈춘다. 그 표면에는 만개한 꽃이 그려져 있고 작은 지문도 묻어 있다. 어쩌면 나는 그 토기 임명장의 명령에 따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의 문을 열라고, 다 받아들이라고, 누군가의 인생에 멋진 순간을 만들어 주면서 살아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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