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망명해 순국할 때까지 수많은 업적남겨
1879년 1월 13일 충북 문의군(현재 청원군)에서 중추원 의관을 역임한 신용우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신규식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채호'(申采浩), '신백우'(申伯雨)와 함께 '산동삼재'(山東三才)라고 불렸다. 17세 때 신학문에 뜻을 세우고 상경해 관립한어학교를 거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해 무덕(武德)을 쌓게 됐다.
신규식은 한학 등 구학문에 능통하고 문학에도 탁월한 자질을 지녔지만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국력배양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육군참위(參尉)로서 지방군대와 연계, 대일항전을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하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피를 토하듯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썼다. 민영환과 조병세, 홍만식 등은 자결했다.
신규식 선생도 을사늑약 체결 후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려다 나철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약 기운이 번진 오른쪽 눈은 시신경을 다쳐 애꾸가 됐다. 거울을 들여다본 신규식은 냉소를 지었다. "애꾸, 그렇다. 이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기로 하자. 어찌 나 한 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징이다." 이때부터 청년 신규식은 흘겨볼 예(睨)자, 볼 관(觀)자를 써 '예관'(睨觀)으로 자호를 삼아 끝까지 사용했다.
26살의 당시 신규식은 '죽음은 거름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내 한 몸 거름이 되어 무수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훗날 그의 생각은 '치욕을 알면 피로써 죽음을 할 수 있고, 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한다'라는 투쟁신념으로 바뀌었다. 그의 목숨을 구한 홍암 나철 선생의 영향을 받아서다. 신규식 선생이 대종교에 입교한 것은 당연했다.
이후 선생은 문동학원, 덕남사숙을 설립하고 지원했다. 또 중동(中東)학교장에 취임하는 한편 공업전습소생들을 중심으로 한 '공업연구회'를 조직했다. 월간 '공업계'를 창간하기도 했다. 윤치성, 민대식 등 퇴역장교를 규합해 황성광업(廣業) 주식회사를 설립한데 이어, 분원자기공장도 설립해 고려자기 재현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선생은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해 순국할 때까지 약 12년동안 여러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첫째, 당시 세계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하면서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두 가지 운동노선을 접목시켰다. 혁명가적 열정과 선각자적 혜안을 함께 갖춘 선생은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 송교인(宋敎人), 진기미(陳其美), 손문(孫文) 등과 교류하며 중국신해혁명에 외국인으로 참여해 나중에 중국국민당정부와의 항일연계투쟁의 기틀을 마련했다.
1911년 여름 어느 날 선생은 손문과 함께 자리했다.
"예관선생이 우리 동맹회를 도와주신 것은 참으로 장한 일이십니다."
"바로 중국혁명운동이 한국독립에 직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양국 사이는 순치(脣齒)의 관계였습니다만 중국이 우리를 속국시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혁명이념으로 볼 때 과거 우리에게 진 묵은 빚을 청산해주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듣던 대로 훌륭한 논객이요, 애국자이십니다."
신규식 선생과 손문의 혁명적 동지애는 변함없이 지속됐다. 이 우정을 바탕으로 선생은 손문의 도움을 얻어 많은 우리 젊은이들을 적성에 따라 교육시켰다.
둘째, 3․1독립운동과 상해 임정수립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선생은 1917년 조소앙(趙素昻), 박용만 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선포한 '대동단결선언'을 통한 핀란드 및 폴란드 등 당시 피압박민족의 독립을 열거하며 이는 좋은 징조이므로 우리나라도 통일된 최고기관 즉 정부의 조직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 동제사를 설립해 국내와 일본등에 동지들을 밀파, 2․8독립선언에 영향을 끼쳤다.
1919년 3․1운동이 터졌고 상하이에서 선생은 프랑스 조계 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 정부수립을 추진했다. 언론인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명인 오세창은 "3․1운동은 예관에 의해 점화되었다"고 단언했고, 당시 일경(日警) 비밀정보도 "소요를 유발시킨 데에는 상해 거주 불령선인들의 선동에 크게 힘입었다"라고 썼다.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신규식 선생은 그해 5월에 손문 등 중국 광동정부로부터 국가승인을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도 거뒀다. 그러나 정부수립 후 고질적 파벌의식과 출세욕 등이 뒤엉켜 1921년 4월 이후 임정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선생은 병원에 누워 의정원 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4월 10일 소위 '재미파'(在美派) 이승만이 내각수반이 됐다. 이듬해까지 병석에 누운 선생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면서 25일동안이나 불식(不食), 불언(不言), 불약(不藥)을 고집했다.
1922년 9월 25일. 선생은 마지막 남은 숨을 호흡단절법으로 끊고 이승을 버렸다. '정부… 정부…' 희미한 소리가 숨을 거두는 그의 목에서 새어나왔다. 단식 25일만에 처음 나온 말은 선생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신규식 선생이 남긴 명저(名著) '한국혼'(韓國魂)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 망국(亡國)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 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 글에 담긴 선생의 철학은 목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소신에 찬 행동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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