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비워야 채운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3-01-02 10: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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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점부터 어긋나는 성공과 실패 도식
가치 지향의 삶을 지향하는 노마드 정신

2011년 한국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뉴스가 됐다.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육상황제 우사인 볼트가 100m 경기에서 실격해 탈락한 것이다. 이를 두고 세계 유수의 언론들은 '주인공 없는 게임, 보석 없는 왕관'이라고 평가했다. 볼트는 100m를 완주하기는커녕 뛰어보지도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출발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스타트(start) 반칙을 하면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졌지만 이제는 다시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규칙을 어겨 경주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한 해의 출발점에 서 있다. 어떤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까?

◇ 높은 가치를 추구하면 실패란 없어

가치 지향을 바로 세우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이다.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정해두고 이를 향해 내달릴 경우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그 하나는 실패다. 실패는 절망과 자책감과 모멸감 등 온갖 부정적 정서를 낳는다. 다른 하나는 성취 혹은 성공이다. 이는 매우 드문 경우다. 하지만 목적을 이룬 후에 맛보는 잠깐의 환희에 이어 허무와 공허감이 몰려든다. 그래서 또다른 목표를 세우고 사력을 당해 질주하게 된다. 그 어떤 경우에도 쓴 맛이 남는다.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것일까? 목적 지향의 문법을 버리고 가치 중심의 삶을 선택하는 다른 길도 있다.

독일의 철학자 오트프리트 회페(Otfried Hoffe)는 '선'이라는 덕목을 잘 해부했다. 그는 우리가 '좋다'라고 말하는 것들은 실로 다양하며, 실제로 '좋은 것'이거나 윤리적 의미에서 '그 자체로' 좋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좋음'을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한다. 그 첫째는 '잘한다'는 의미에서의 '좋음'이다. 전문성을 지니거나 기술적으로 탁월한 것을 말한다. 회페는 이를 가장 낮은 단계라고 본다. 둘째는 '도움이 된다'는 의미에서의 '좋음'이다. 누군가에게 혹은 조직에게 좋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는 실용적 가치와 유익을 주므로 특정 사람이나 공동체에 좋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를 중간단계라고 한다. 셋째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이는 정신적 가치의 차원이다. 이해관계를 계산하지 않는 사랑이나 환대, 의로움이나 용기나 배려 등과 같은 사회적 덕목과 관련된다.

아마 우리의 가치의 지평은 대부분 중간 단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고상한 가치를 알면서도 외면하기 일쑤이고 가끔 장신구로 걸쳐 치장하는 수준으로 행동한다. 불확실성이 가득하고 경쟁과 대립이 난무하는 거친 사회에서 살아남고 자기 몸 하나 지탱하기조차 버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높은 가치를 추구하고자 결심해야 하지 않을까. 가치를 추구하면 서버이벌이 아니라 삶 자체가 소중해진다. 고상한 가치를 움켜쥐면 기계적인 삶을 벗어나 삶에 새로운 활력이 생겨난다. 높은 가치를 지니고 타자를 소중히 여긴다고 손해를 보거나 자기 소모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런 삶에는 실패란 없다. 지향하는 '가치'를 살아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목적 중심의 좌표를 버리면 무척 자유롭고 편해진다. 그리고 삶이 예술이 되기 시작한다. 거기 음악이 들린다. 애가와 송가와 연가가 흐르고 합창과 춤이 이어진다. 새로운 무대가 펼쳐진다. 대본이 없는 서사가 이어진다. 다채로운 희극과 비극으로 채워지는.

◇ 전심을 다할 때 길은 열린다

언젠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발을 본 적이 있다. 흑백 사진에 담긴 강수진의 발은 발가락이 짓뭉개어지고 굳은살이 배이고 골격이 마구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이를 보는 순간 내 몸에 전율이 흘렀다. 우아하고 경쾌하게 무용을 하는 모습이나 품격 있는 자태를 자아내는 강수진과 너무나 대조됐기 때문이다. 지독한 연습의 결과였다. 수백 켤레의 발레 슈즈가 닳아 없어지도록 연습한 그 뒷이야기는 눈물겹기조차 하다. 하루 15시간에서 19시간을 연습했다고 한다. 배역없는 무명 발레리나로 7년의 세월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 웃음 뒤에는 쓴 눈물이 있었다. 그 가벼운 몸놀림은 강철처럼 강한 그 발과 다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지금 자신을 혹사하기까지 과도한 노동을 해야 한다거나 '열심히' 하기만 하면 성공하리라는 허황된 성공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매순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강수진의 의지를 거울로 삼자는 것이다. 무엇이든 전심을 다할 때 길이 열리고 심원한 변화가 일어난다. 공부, 기술, 노동, 창작 작업, 연구 개발, 사업 등 모든 활동에서 상당한 양의 축적을 만들어낼 때 질적 도약이 일어난다.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는 상당한 연료를 소진하며 전력질주를 하는 어느 시점에선가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20년전 대학원 공부를 할 때 독서보고서(book review) 점수를 매번 만점을 받았다. 한 번은 80명 정도가 수강하는 강의에서 한 권의 책에 대한 서평 점수가 9점이 나왔다. 즉각 조교에게 찾아가 물었다. "9점을 준 이유가 무엇이냐?" 파란 눈의 조교는 친절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지적해 준대로 다시 수정해서 제출해도 되겠느냐?" 조교는 의외로 반응하며 '좋다'고 대답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 독서보고서를 수정해서 제출했다. 그래서 10점을 받았다. 자랑이 아니다. 나의 삶의 소중한 체험에 대한 증언이다. 지금 나는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몇 년째 서평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그때 몇 년간 몰입해 정교하게 서평을 쓴 경험들과 축적된 노하우가 바탕이 된 것일 게다.

해외의 어느 연구기관에서 90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죽음의 시간이 멀지 않은 그들에게 던진 질문은 하나였다.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 노인들의 대답에 공통되는 점들이 크게 세 가지였다. 먼저, 무슨 일이든 진지하게 하겠다. 미지근한 태도와 차가운 마음으로 한 것 치고 나에게 행복을 주거나 타인에게 감동 주는 게 없었다. 다시 삶이 주어진다면 열정을 다해 살고 싶다. 둘째, 인생을 좀 더 모험적으로 살겠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을 하겠다. 셋째, 내가 죽고 나서도 계속 될 일을 위해 투자하겠다. 소중한 가치가 있는 일에 몸을 던져 그것이 나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정한 삶의 좌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좌표에는 각자의 위치가 고정돼 있고 온갖 숫자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언제나 특정한 방향으로만 살도록 각본이 짜져 있다. 이 좌표를 근본적으로 검토하는 일이 먼저다. 성공과 실패라는 도식을 내던지고 삶의 흐름을 초원처럼 펼치면 다른 삶의 시간이 열린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미답의 길들이 열려 있고 함께 순례하는 길동무들이 있다. 밤하늘에는 별빛들이 모여 성좌를 이루어 반짝인다. 가치를 따라 길을 걷는 삶은 이와 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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