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규제 합리화로 기업투자 유도를"
유럽이 플라스틱을 비롯한 일회용품 포장재의 재활용 및 재사용 목표치를 또 다시 상향조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순환경제' 구축에 본격적인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의 행정부격인 EU집행위원회는 일회용품 포장재 폐기물에 대한 새로운 규제안을 공개했다. 지난 2018년 이미 EU는 2025년까지 일회용 포장재의 재활용 비중을 65%, 2030년까지 70%까지 끌어올리기로 합의한 바 있다. 궁극적으로는 2030년까지 모든 포장재가 재활용 가능하도록 설계하고, 2035년에는 포장재들이 실제 유의미한 규모로 재활용될 수 있도록 관련 기반시설 정비를 끝마칠 계획이다. 이는 EU의 '2050 탄소중립' 목표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다.
이번에 EU집행위원회가 제안한 신규안은 세부적인 수칙들을 재정비하고 있다. 규제를 구체화해 실현가능성을 높이고, 시장에 확고한 신호를 줌으로써 더 많은 폐기물이 생겨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방편이다. 일례로 해당 규제안에 따르면 플라스틱 음료수병만 놓고 보더라도 재활용 가능한 재질로 제품을 구성하는 차원을 넘어 실제로 재활용 과정을 거쳐 다시 쓰인 재질이 2030년에는 30%, 2040년에는 65% 이상 포함돼 있어야 한다. 티백, 커피캡슐, 작은 플라스틱 봉투, 과채류용 스티커 라벨은 퇴비화 가능한 플라스틱 재질이어야 한다.
이밖에도 규제안은 종이, 금속, 유리 폐기물에 대한 세부수칙까지 포괄하고 있다. 이로써 플라스틱에만 적용되던 음료용 페트병 보증금 반환 시스템이 금속캔까지 확대된다. 또 2030년까지 일회용컵 재사용률은 20%, 2040년까지 80%을 목표로 하고, 온라인 배송용 포장재는 각각 10%와 50%로 한다. 과채류 포장재, 미니 샴푸병과 같은 호텔 편의용품 등 '대체가능한' 포장재 범주로 묶이는 경우 시간을 두고 달성하는 목표치 없이 한꺼번에 전면 금지될 예정이다.
지난 10년간 사용량이 20% 늘어난 포장재는 환경오염의 주범이다. EU 시민들은 매년 1인당 180kg의 포장재 폐기물을 발생시키고 있다. EU에서 한번도 재사용된 적 없이 새롭게 생산되는 원자재 가운데 플라스틱의 40%, 종이의 50%가 포장재에 쓰이고 있다. EU는 이같은 추세에서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경우 2030년 전체 포장재 폐기물은 19% 늘고, 플라스틱만 놓고 보게 되면 46%까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EU 내에서 포장재 폐기물에 대한 규제가 신규안 내용대로 강화될 경우 1인당 포장재 폐기물은 2030년 5%, 2040년 15% 줄어들 것으로 집계됐다.
◇환경만 지키나?...탄소국경세·인플레이션방지법에 따른 '자구책'
EU가 포장재 규제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단순히 환경을 지키자는 취지만이 아니다. 이같은 움직임은 2023년부터 시범운영되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에서 우위를 선점하고, 미국발 '인플레이션방지법'(IRA)에 따른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한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공급망 리스크에 따른 자원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고 폐자원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순환경제는 기존 산업혁명 이후 약 260년간 자원의 조달, 생산, 소비, 폐기에 이르는 과거 '선형경제' 모델을 벗어나 최대한 장기간 자원을 순환시키면서 이용하고, 폐기물 등의 낭비를 줄여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제 모델을 말한다.
전문가들은 순환경제 시장은 혁신과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 등을 통해 2030년에 이르면 시장 규모가 4조5000억달러(약 60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번 신규 규제안이 시행될 경우 이산화탄소가 2300만톤 감축되고, 물 사용량은 110만㎥ 절감된다. 이산화탄소 감축분을 배출권 거래제 가격으로 환산하면 2조6000억원에 이른다. 조만간 유럽발 '탄소국경세'가 도입될 예정이기 때문에 관세나 배출권 거래제 시장에서도 확실한 우위를 가져갈 전망이다. 환경파괴에 따른 사회·경제적 비용은 64억유로(약 8조7000억원)까지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이번 규제안은 EU가 독자적이고 안정적인 배터리 공급망 구축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유럽핵심광물법'(CRMA)과 맞물려 시너지를 낼 전망이다. 전기차 배터리 산업은 가격 경쟁력이 중요하다. 최근 미국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를 채결한 국가에서 채굴하거나 가공한 배터리를 2029년까지 100% 사용하도록 하는 인플레이션감축법을 도입하면서 EU는 값싼 중국산 배터리 수입에 차질이 생겼고, 미래 성장동력인 전기차 시장을 잡기 위해 순환경제 시스템의 빠른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상황이다. 이에 따라 EU는 폐배터리에서 필요한 광물을 추출해 다시 써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도시광산' 산업 클러스터 형성에도 힘쓰고 있다.
◇국내기업 86% 순환경제 목표 '부담'..."규제 합리화 시급"
우리 정부도 지난 2020년 수립한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의 10대 과제 가운데 하나로 '순환경제 활성화'를 두고 있고, 지난 2021년 12월에는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 공동으로 '한국형(K)-순환경제 이행계획'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2030년 플라스틱 재생원료 사용비중을 30% 이상 늘리고, 사업장내에서 사용되는 플라스틱의 45%를 바이오플라스틱으로 대체하는 등의 '순환경제 정책목표'가 제시됐다.
문제는 목표치만 높게 설정돼 있고, 세부적인 규제 재정비나 실질적인 이행방안이 따라붙지 않아 기업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1일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제조기업 304개사를 대상으로 '기업의 순환경제 추진현황과 정책과제'를 조사한 결과, 10곳 중 8곳이 넘는 86%가 순환경제 목표달성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한 폐배터리 재활용업체는 "폐배터리 금속 회수를 하려면 운반차량과 재활용 설비를 중복해서 운영해야 한다"며 "용도만 다르고 원료는 동일한 폐배터리인데 폐기물 구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설비를 2배로 가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기차 폐배터리는 '일반 폐기물'이고 전기차를 제외한 가정용 폐배터리는 '지정폐기물'이므로 차량·설비 등을 따로 가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활용 기술 수준도 점차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추세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표한 기술수준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재활용 기술수준은 EU를 100으로 보면 한국은 80으로 일본(95)과 미국‧중국(85)보다 낮은 수준이다. 재활용기업 규모가 영세하다보니 기술투자 여력이 없고 기술개발 속도가 더딘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실제로 한 제지업체는 "감귤껍질을 재활용해 골판지로 제조하는 기술을 개발했는데 순환자원으로 인정받지 못해 폐기물 규제를 적용받아야 한다"며 "폐기물 규제를 적용받으면 폐기물처리업 인허가, 설치검사, 정기점검, 실시간 보고 등 의무를 준수해야 하므로 해당 기술 상용화를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태희 대한상의 상근부회장은 "재활용시장에 우리 기업들이 과감하게 투자하기 위해서는 규제 합리화와 기술개발, 폐자원 확보 인프라가 시급하다"며 "기업들이 정부의 순환경제 정책에 동참의지가 높지만 목표달성에 부담을 느끼는 만큼 순환경제 사업에 대한 환경성과를 측정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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