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밤이 선생이다'...나에게도 그런가?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5-02-24 08:00:02
  • -
  • +
  • 인쇄

'밤이 선생이다'는 은유는 우리에게 잔잔하면서도 심원한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의 인기는 실은 이 기발하고 역설적인 표현에 힘입은 바가 적잖을 거다. 황현산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그의 작가 정신, 언어를 낯설게 배치하고 풀어내는 그의 절묘한 문체,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글쓰기 기법, 글 속에 흐르는 문학적 향기, 이 모든 것들이 '밤이 선생이다'는 한마디 발화 속에 다 담겨있는 것같다.

그런데 책 속에 담긴 80개의 산문들을 다 뒤져도 '밤이 선생이다'를 제목으로 삼고 있는 글이 보이지 않는다. 대개의 시집이나 산문집은 작품 속의 제목 중 하나를 선택하기 마련인데, 이 어찌된 일인가!

밤이 선생이라니?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독자들에게는 '밤'과 '선생'의 의미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작가는 과연 어떤 맥락에서 이를 말하고 있는 걸까.

산문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에서 그 단서를 찾게 된다. 이 글에서 황현산은 뮌헨 올림픽 개막행사인 윤이상의 오폐라 <심청>을 보다가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라는 가사 자막을 보고 이를 둘러싼 일화를 들려주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대본의 착상은 아마도 괴테의 『파우스트』 가운데 한 구절,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는 그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여기서는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서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이다."

작가로서의 황현산 특유의 시간 감각과 연결되어 시간의 질과 성격이 묘사된다. 그에 의하면, 낮은 이성의 시간이고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인문학적 언어를 빌리자면, 둘을 각각 로고스의 시간과 카오스의 시간, 아폴론적 시간과 디오니소스적 시간으로 비유할 수도 있을 성싶다.

또한 황현산은 낮을 사회적 자아의 세계로, 밤을 창조적 자아의 시간으로 대조한다. 낮이면 우리는 사회적 질서 속에서 사회적 자아의 가면을 쓰고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회적 무대에서 연기한다. 하지만 밤이 되면 우리는 홀로 어둠 속에서 자신의 빛을 뿜어낸다. 낮은 조형된 틀이 우리 신체와 의식을 옥죄고, 밤에는 이에서 해방되어 상상력이 춤춘다.

그러므로 황현산이 말하는 밤은 깊은 밤이자, 자유로이 상상하고 사색하며 언어의 씨줄과 날줄을 잇는 작가의 밤인 것이다. 어떻게? 글쓰기를 하며, 창작을 하면서.

황현산의 밤은 물리적 시간이기도 하다. 해가 지고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작업하는 글쓰기의 장인, 그 사람은 모두가 잠든 시간에 깨어 배운다. 낮시간에 오염된 나를 건져내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 언어를 길어 올린다. 밤은 선생이 되어 낮에 잃은 것을 되찾게 하고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한다.

황현산이 암시하는 '밤'과 '선생'의 이미지와 별개로 독자는 다르게 해석할 자유가 있다. 밤을 자기 삶의 고통과 고난의 시간으로 이해한다면, 그 어둔 밤은 삶의 진실과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깨닫게 되는 스승이자 레슨 과정이 된다. 우리는 저마다 그간 통과해 온 밤들과 지금도 견디고 배우고 있는 밤이 있을 것이다. 밤이 선생이 되어 잔인한 흑암의 난타를 가하며 우리를 단련시키고 새롭게 조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이 밤은 블랑쇼가 말하는 재난의 밤, 카오스, 혹은 바깥의 경험과도 같다. 블랑쇼는 글을 쓰는 이는 짙은 밤의 경험, 자기 삶의 자리에서 추방당하고 추락하는 카오스의 상태, 나를 잃어버리는 바닥의 밑바닥,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는 나의 바깥에서 진정한 글쓰기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내 초라한 인생을 되돌아보니, 과연 그렇다. 살아오면서 어찌할 수 없는 묵직한 어둠을 마주하고 깊은 고독을 경험한 자리에서 나는 책을 읽고 시를 썼다. 그때마다 삶에 대해, 삶 자체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졌던 것 같다. 나의 밤은 레슨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밤을 꺼려 한다. 언제나 빛을 찾고 낮을 기다린다. 하지만 진정 자기 삶을 찾는 이들은 밤을 껴안는다. '밤이 선생이다'고 말할 있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 강한 자이다.

심리학과 정신분석을 공부한 어느 독자는 이렇게 말한다. "황현산의 밤이 무의식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신선하고 예리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규정된 나, 사회적 자아, 낮의 질서와 규범과 힘들이 해체된 자리에서 우리의 무의식은 춤추고 일렁거리고 말을 건다. 무의식의 장이야말로 창조와 생성의 무한한 원천이라고 본다면, 실로 밤은 잠재성이 충만한 에너지의 장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밤이 선생이다. 밤을 껴안을 일이다. 밤에게 배울 일이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KT 판교·방배 사옥 경찰 압수수색…서버폐기로 증거은닉 의혹

해킹사고 처리과정에서 서버를 의도적으로 폐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KT가 압수수색을 당했다.19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

셀트리온, 美에 1.4조 韓에 4조원 투자..."4Q 실적 턴어라운드"

일라이 릴리로부터 미국 공장을 인수해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인 미국에 생산기지를 확보한 셀트리온은 의약품에 대한 미국 관세리스크를 털어내고

한국ESG기준원, ESG평가 'A+등급' 20곳...올해도 S등급 'O'

하나금융지주와 KB금융, 신한지주와 현대백화점, 현대로템 등 20개 기업이 한국ESG기준원에서 주관하는 '2025 ESG 평가'에서 통합등급 'A+'를 획득했다. 이

CJ제일제당 '빨대없는 스토어' 캠페인...대체소재로 PHA 제안

CJ제일제당이 자원순환사회연대(NGO), CJ푸드빌과 함께 일회용 석유계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줄이기 위한 '빨대없는 스토어 만들기(Be Straw Free)' 캠페인을

호텔신라, 친환경 운영체계 구축 나선다

호텔신라의 모든 호텔 브랜드가 친환경 호텔로 도약한다.호텔신라는 글로벌 친환경 인증기관인 '환경교육재단(FEE; Foundation for Environmental Education)'과 업

KT 새 대표이사 후보군 33명...본격 심사 착수

KT의 대표이사 후보 공개모집이 마감되면서 차기 대표이사 후보군이 33명으로 확정됐다.KT 이사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4∼16일 진행한 대표이사 후보

기후/환경

+

[COP30]"BTS에 영감받아"...K팝 팬들도 '탈탄소화' 촉구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가 열리고 있는 브라질 벨렝에서 케이팝(K-팝) 팬들이 '문화 분야의 탈탄소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냈다.K-팝

내년부터 수도권 생활폐기물 직매립 금지...1700톤 쓰레기 어디로?

내년부터 수도권 지역에 생활폐기물 직매립 금지가 시행됨에 따라, 소각장 설비를 아직 마련하지 못한 경기도와 서울 등 지방자치단체들은 예기치 못

[COP30] 산림지키는 기후총회에...농업 로비스트 300명 활동

브라질 벨렝에서 열린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에 300명이 넘는 농업 로비스트가 몰리자, 원주민과 환경단체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COP30] AI는 기후위기 해결사? 새로운 위협?

인공지능(AI) 기술이 기후대응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는 동시에 막대한 전기수요를 발생시켜 기후위기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18일(현

섬에서 새로 발견된 미기록 곤충 55.5% '열대·아열대성'

국내 섬 지역에서 발견된 미기록종 곤충 가운데 약 절반이 열대·아열대성 곤충인 것으로 나타났다.국립호남권생물자원관은 2021년부터 2024년까지

'농촌 기후대응 직불금' 도입되나...기후보험 대상 확대

기후변화로 인해 농작물을 재배하기 적합한 지역이 바뀌는 경우나 기후변화 대응 품종을 도입할 때 직불금을 주는 방안을 정부가 추진한다.정부는 19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