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감각 없이 내뱉는 말, 독화살될 수도
한 시골 총각 선생님이 돌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헛디뎌 개울에 빠졌다. 바지가 다 젖은 그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으로 되돌아왔다. 마침 도시에 살고 있는 어머니가 아들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돌아온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듣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그래, 네가 밟았던 그 돌은 바로 세워두고 왔느냐?"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무슨 선생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당장 가서 돌을 바로 놓고 오거라. 그 후에 옷을 갈아입어라!"
아들은 젖은 옷을 입은 채 개울에 가서 돌들을 튼튼하게 세워두고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교사를 위한 좋은 이야기를 모은 책 <꿈꾸는 정원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잔향이 내 속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허술한 돌멩이에 넘어질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섬세한 감각이 놀라웠다. 그 말 속에는 한 여인의 인격과 타인을 위한 배려까지 녹아있다. 통찰력과 타자를 위한 윤리까지 지녔다. 한 마디 말로 아들을 깨우쳤다.
◇ 악은 '말과 표현'에서 발화된다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사상과 사유를 꿰뚫는 키워드는 2개다. 그 하나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이고 다른 하나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이다. '활동'은 노동, 작업, 사회적 결연과 소통과 같은 공동체적 활동을 말한다. 관조는 활동적 삶과 대조적으로 고대 철학자들처럼 사색하고 성찰하는 내면적 사유 활동을 말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서양의 전통에서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이 인간에게 근원적이며, 활동적 삶(vita activa)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진 것은 하나의 편견이라고 지적한다. 그녀는 '사유는 오로지 소수에게만 알려진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말한다. 즉 철학자나 현인이나 소수의 특권적인 사람만이 차원 높은 사유나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요지는 활동적 삶을 무시하고 관조적 삶만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무지라는 것이다. 그녀는 시민의 참여, 공동체를 위한 정치적 행위, 소통을 위한 열린 공론의 장, 타자를 위한 윤리적 실천이 없이 고요한 '사색'의 세계로 퇴거한 결과 정치적 행위가 왜곡되고 사회는 힘과 폭력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활동적 삶 즉 사회적 소통과 정치적 행위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관조적 차원이 필요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정치적 사회적 삶이 관조적 삶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창안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오독하는 이들이 있다. '악의 평범성'이란 대개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저지른다거나, 그것이 평범하고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 아니다.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돌프 아히히만(Otto Adolf Eichmann)의 재판을 참관하며 충격을 받았다. 아히히만은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후 '악은 특별한 괴물의 얼굴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설파했다.
평범성으로 번역된 'banality'는 일상성 혹은 진부함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녀가 던지고픈 메시지는 '악은 우리 곁에 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자신들도 포함된다. 아렌트는 아히히만이 악에 가담한 이유가 사유하는 힘의 결핍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능력, 공감적 사유와 태도의 결핍이 그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누구든 사적 감정이나 권력 감정, 명예욕이나 우월감 또는 어떤 신념에 사로잡혀 스스로 사유를 멈추고 불법적 행위를 '관행' 또는 '통과의례'로 여기기 시작할 때 악은 출몰해 활개 친다. 주어진 제도와 조직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 자기도 모르게 제2의 아이히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평범한 악이 드러나는 징조는 '말과 표현'에 있다고 봤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거나 주어지는 질문이나 자극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할 때 우리는 못된 말을 하고 남에게 상처 입힌다. 몸에 배인 상투어나 상투적 표현에 매몰돼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폭력적 언어나 혐오 표현을 내뱉게 된다. 우리가 배우고 사용하는 주류적 언어가 차별과 혐오와 공격의 유전자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적의와 혐오를 선동하는 권력자나 교활한 정치인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길들여진 사유나 자신의 생각에만 사로잡혀있으면 아히히만처럼 될 수 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사유하지 않으면 나도 너도 선량한 차별주의자, 착하고 신사적인 지배자, 비악의적인 혐오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한 어반(Hal Urban)이 남긴 말은 틀린 은유가 아니다. "천사와 악마의 차이는 그가 하는 말이다." 악의 평범성만이 아니라 선의 평범성도 있다. 후자를 선택하는 법을 익혀야 하지 않을까.
◇ 서로를 살리는 언어 감각 키워야
2008년 3월 오프라 윈프리 쇼에 한 흑인여성이 출연했다. 다섯 아이를 둔 싱글맘이다. 이 여인은 삶의 고통과 무게를 견디지 못해 마약과 매춘에 빠졌다가 그만둔 지 2년이 됐다. 그녀는 흐느끼며 고백했다.
"난 다 소모(burn out)되었어요. 내 자신이 더러워졌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어요. 샤워를 해도, 머리를 꾸미고 화장을 해도 그 더러움을 씻을 수가 없어요."
오프라 윈프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당신은 소모되지 않았어요, 당신은 실수를 한 거예요. 오늘 당신이 한 말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둘은 포옹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장면에서 울컥한 것이 내 속에서 올라왔다. 저렇게 단순한 말로 마음을 만지는 그 센스에 매료됐다. 내 속의 근육질이 사라지고 따스하고 여성적인 그 무엇이 자라나는 듯했다.
공감은 열린 마음과 함께 섬세한 기술을 담은 언어적 감각이 필요하다. 아시다시피 서로를 자극하고 폭력적으로 만드는 특정한 언어와 대화 방법들이 있다. 격한 감정으로 내 뱉는 말, 하대하는 말, 혐오 표현, 차별적 언어, 비교하는 말, 판단하고 평가하는 말,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는 말, 비방과 모욕 등등 그 양상은 실로 다양하다.
우리는 이에 익숙하다. 알면서도 자신의 언어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성찰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관조적 거리가 필요하다. 글이나 기술을 연마하는 것처럼 말도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유행하는 대화법이나 설득의 논리를 다룬 책들은 내던져야 한다. 대개 나의 목적을 위해 타자를 설득하고 꾀는 비즈니스 기법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심오한 개념어나 고상한 마법의 언어가 아니어도 살리는 말을 할 수 있다. 타자를 사유하는 가슴의 언어, 사랑의 문법이면 족하다.
타자는 나의 바깥이다. 나 역시 타자의 바깥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던진 말은 이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날 선 말이라면 나에게도 치명상을 입힌다. 반대로 그 말에 생명이 담겨 있으면 전혀 다르다. 말하는 순간 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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