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규제와 환경규제로 '선저청소' 수요증가세
이물질 제거와 수거까지...선체탑재형도 개발중
올 1월 한 유람선이 호주 입항을 거부당해 승객 수백명이 바다에 고립된 사건이 있었다. 거부당한 이유는 유람선에 붙은 따개비 등 해양생물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유람선은 먼바다에 정박한 채 전문 다이버를 고용해 몇 일에 걸쳐 선체를 청소한 다음에야 입항할 수 있었다.
호주뿐 아니라 네덜란드도 다른 지역의 해양생물이 유입돼 해양생태계가 교란되는 것을 막기 위해 3개월 이내 선체를 청소했다는 사실을 입증한 선박만 입항을 허가하고 있다. 현재 일부 국가에서 시행하는 이 규제는 국제해사기구(IMO)에 의해 이르면 내년부터 국제선을 운항하는 모든 선박에 적용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선체청소 수요는 급증할 전망이다.
바로 이 수요를 노리는 국내 스타트업이 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선체 하부 구석구석 붙어있는 수초와 따개비같은 이물질을 제거하는 선저청소로봇 '치로'(CHIRO)를 개발한 로봇전문기업 에스엘엠(SLM)이 그 주인공이다. 현재 개발된 선저청소로봇 가운데 상용제품을 판매한 곳은 전세계적으로 에스엘엠이 유일하다.
대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에스엘엠 창업자 박영준(58) 대표는 "현재 전세계 선체청소 시장규모는 약 1조원에 이르지만 앞으로 이 시장은 6조원 이상 커질 것"이라며 "우리 회사 로봇은 다이버가 위험해서 작업할 수 없는 선체 밑바닥 이물질까지 싹싹 제거해주기 때문에 효율적"이라며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자신했다.
◇ '선저 이물질 제거' 왜 중요?
선박은 통상 1~2년에 한번씩 선저 이물질을 제거한다. 선체 밑부분은 바닷물에 잠겨있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수초와 따개비, 굴 등 패각류들이 달라붙는다. 이를 방치하면 연비가 10~20% 높아진다. 연료비 절감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선저 청소를 해줘야 하는 것이다. 박영준 대표는 "선박이 바닷물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데 배 밑부분에 이물질이 붙어있으면 마찰계수가 커져서 연료가 많이 소모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선박의 연비향상은 곧 탄소배출을 낮추는 효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선저청소는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 국제무역의 90%는 선박에 의존하는데, 국제해운의 탄소배출량은 2018년 기준 전체의 3%를 차지한다. 이에 IMO는 2050년까지 해운 온실가스 배출량을 '0'으로 하겠다는 목표 아래 올 1월부터 탄소집약도 등급제(CII) 등 온실가스 배출규제를 시작했다. 5000톤(t) 이상의 선박은 2026년까지 연간 2%씩 탄소배출량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박 대표는 "IMO의 환경규제가 시작됐기 때문에 대형선박들은 연비를 향상시켜 탄소배출을 줄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면서 "연비 1%를 개선하는데 수천억이 들어가는데 연비향상을 위해서라도 선저청소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자칫 구조물에 해양생물이 부식할 정도로 쌓이는 '하드 바이오파울링'(Biofouling) 상태가 되면 부식으로 선체가 손상되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해양생태계 보호를 위해 IMO가 선박부착생물을 통제할 조짐이어서, 국제선박들은 청소주기는 더 짧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미 호주와 뉴질랜드, 네덜란드 등은 3개월 이내 선저를 청소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입항을 허가하고 있다. 해양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칩입종을 막기 위한 조치다. 박 대표는 "현재 선저청소 주기는 대략 1.5년인데 IMO의 규제가 발효되면 청소주기는 연간 3~4회로 짧아질 것"이라며 "이 수요를 다이버들이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선박 로봇청소 비중 "3년 후 30% 이상"
국제선을 오가는 길이 300m의 대형선박들은 선저청소가 워낙 위험해서 다이버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앞으로 탄소규제와 해양생물 규제로 이물질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로봇을 동원해서 청소할 수밖에 없다. 에스엘엠은 안전과 친환경, 비용 측면에서 장점이 많은 로봇청소 시장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보고 글로벌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박 대표는 "선체 청소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고 단언했다. 청소로봇 시장이 서서히 열리고 있다는 의미다. 2022년 전세계 10만5620척의 선박 가운데 로봇청소 비중은 3% 정도였다. 하지만 2025년에 이르면 선박대수도 10만9205척으로 늘어나고, 청소주기가 3~4개월로 짧아져 선체청소 시장규모는 4조6000억원으로 커진다. 이 시장에서 로봇청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30% 이상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선박 청소주기가 짧아지면 선박 수명이 연장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로봇으로 선체의 이물질을 제거하면 도막손상을 최소화시킨다. 그만큼 선박 수명도 길어진다.
◇ 12년에 걸친 개발···"글로벌 시장 목표"
사실 박영준 대표가 선박청소로봇을 개발하기 시작한 때는 2010년부터다. 당시 삼성중공업 연구소에 몸담고 있던 박 대표는 회사의 미래사업발굴 차원에서 '선저청소로봇' 개발을 맡았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차 걸친 프로토타입의 시제품이 나왔지만 2017년 국내 조선해양산업이 위기에 처하면서 모든 신사업 개발이 중단돼 버렸다. 그동안 개발에 투입된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까워 회사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아 2018년 에스엘엠을 창업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박 대표는 "막상 창업하고 나서 개발한 청소로봇을 운항하는 선박에 사용해봤는데 조선소에서 시범사용한 것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면서 "실제 운항하는 선박들의 바이오파울링이 너무 억세고 두꺼워서 기존 개발품으로는 역부족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개발에 매달렸다.
2년간 개발에 몰두한 끝에 선저청소로봇 '치로'를 완성했다. 이 로봇은 평면주행은 물론이고 선체의 오목하고 볼록한 3차원 곡면도 착 달라붙어 주행할 수 있을 정도로 부착력이 뛰어나다. 전체 선체면에서 청소주행이 가능한 영역이 90%에 이른다. 전방과 후방 카메라가 부착돼 있어 로봇의 이동경로와 작업위치까지 실시간 파악할 수 있다. 또 선박에서 제거한 이물질을 모두 수거하기 때문에 선박부착생물로 인한 해양생태계 교란을 막을 수 있다.
박 대표는 "현재 상용화된 로봇은 2019년 개발된 것보다 성능이 월등히 개선됐다"면서 "부착력이나 견인력, 청소성능이 향상됐고, 외부 정화처리시스템까지 연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로봇 1대당 1년에 50회까지 작업할 수 있다"면서 "선박 1척을 청소하는데 15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이틀 정도면 선저청소를 마칠 수 있다"고 말했다. 로봇의 수명은 5년 정도다. 만약 청소작업을 하다 선박 밑으로 떨어지면 둥둥 뜨도록 설계돼 있어 회수할 수 있다. 에스엘엠은 이미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에 '치로'를 판매한 실적을 앞세워 앞으로 글로벌 시장에 본격 진출하겠다는 전략이다.
에스엘엠은 청소로봇과 함께 '선박관리(Hull care) 통합시스템'도 판매한다. 이 시스템은 원격으로 로봇의 청소상태를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것뿐만 아니라 청소이력과 선박상태이력, 최적청소주기도 예측해준다. 또 선체 위치별 선박표면 상태검사나 데이터수집과 분석, 저장도 가능하다. 박 대표는 "이 시스템은 항만에서 선박 청소대행서비스업체들이 이용하기 적합하다"며 "전세계적으로 5000~6000곳에 달하는 청소대행업체를 타깃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지난해부터는 선박 탑재형 로봇을 개발중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국책과제로 에스엘엠은 삼성중공업, KCC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선박 탑재형 로봇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없이 선체표면을 청소할 수 있고, 선체 부식도와 도료상태도 실시간 확인 가능하다. 박 대표는 "올연말쯤 탑재형로봇에 대한 가시적 성과가 나올 것같다"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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