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법원 '정의의 여신상'은 왜 서구와 다를까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3-02-15 08: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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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적 정의는 사회 지탱하는 근본 골간
서구 여신상과 다른 한국 정의의 여신상
▲눈을 가리고 오른손에 수평저울, 왼손에 칼을 들고 있는 서구의 '정의의 여신상' 

예술가인 한 지인이 거대한 궁궐 사진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런 건축물을 보면 불편해요. 여기는 모든 폭력과 비극이 다 담겨있어요." 이 궁전은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기하학적 구도와 솟구친 첨탑들이 어우러져 인도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걸작이자 세계적인 유산이다. 이 예술가의 예리한 통찰력에 나는 공감했다. 궁궐의 건축을 가능하게 했던 절대 권력의 위세와 천문학적인 부가 보이고, 건축에 동원된 사람들의 고역과 굶주리는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궁전이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전 한 법조인이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건물을 가리키며 한 말이 생각난다. "저 건물이야말로 권위주의가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건물이지요." 아시다시피 서초동 법원 건물은 펼쳐진 법전 형상의 20층 건물이다. 윗층에는 고등판사실이, 그 아래층에는 판사실들이 그리고 그 아래층에는 법정이 배치돼 있다. 1층과 2층에는 민원실과 각종 편의시설이 있다. 전형적인 피라미드식 수직 구도다. 법원 옆에는 검찰청이, 그 건너편에는 대검찰청과 대법원이 자리잡고 있다. 인접 지역 건물들은 고도가 제한돼 있어 법원 건물의 위용은 더욱 도드라진다. 건물의 크기와 높이로 '법'과 '법을 소유한 자'들의 전능과 권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 '정의의 여신상' 형상에 담긴 뜻

대법원 중앙홀에는 '정의의 여신상'이 서 있다. 이 여신상은 서구의 '정의의 여신상'과 사뭇 다르다. 한복 차림을 한 여인이 오른손에 수평 저울을 치켜들고 왼손에 법전을 껴안고 있다. 서구의 정의의 여신상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디케상 형상을 하고 있다. 디케상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오른손에 저울을 왼손에 칼을 들고 있다. 저울은 공평을, 칼은 힘을 뜻한다. 힘이 없는 공평은 무력하며 공평이 없는 힘은 폭력이 된다. 법적 정의는 치우침이 없는 공정한 판단과 단호하고 힘 있는 집행을 통해 가능하다는 뜻이다. 두 눈을 가리는 안대는 공평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는 온갖 탐욕이나 권력의 위협이나 사람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뜻한다. 이처럼 정의의 여신상은 사회적 정의를 이루기 위해 사법부가 지녀야할 철학과 자질 그리고 법 집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을 담고 있다.

최근 법원의 판결과 사법적 정의에 대한 불신이 우리 사회에 또다시 확산되고 있다. 최근 대장동 민간사업자들로부터 '아들 퇴직금' 명목으로 50억원 뇌물을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는 곽상도 전 의원의 혐의에 대해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한데서 비롯됐다. 이 판결을 접하는 시민들마다 분통을 터뜨리고 대부분의 언론은 비판적 논조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법원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초라한 판결문을 낭독했다. "아들의 성과급 중 일부라도 곽 전 의원에게 지급되었다고 볼 만한 사정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종합하면, 곽 전 의원이 직접 받은 점이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

이 판결에 민심은 크게 격앙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기본적인 상식을 벗어난 판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원과 검찰에 대한 국민적 비판이 거세다. 판사의 치우침 때문이든 검사의 수사부실 때문이든 양자의 합작품이든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녀와 친인척은 혈연적 관계일 뿐 아니라 경제공동체로서 뇌물 전달 경로로 간주된다는 것이 보통 사람의 상식이자 법 적용 상의 관례다.

정치적 민감성이 큰 사건이기도 하지만 30대 직원이 아빠 찬스로 큰돈을 단숨에 거머쥐었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국민적 반감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들은 이를 특권층의 특혜적 뇌물 사건으로 공정과 상식을 크게 벗어난 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사건을 단지 국민의 법 감정을 벗어난 판결 정도로 해석하는 태도로는 해법을 찾아낼 수 없다. 법 감정 무시 그 이상의 차원이다. 한 마디로 비상식적 판결이자 권력에 대한 굴종 혹은 무기력이 담긴 판결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 심폐소생술 필요한 '정의의 여신상'

과연 정의는 존재하는가? 대법원의 정의의 여신상은 보면 그 실마리를 알 수 있다. 여신상이 지나치게 허약해 보인다. 칼이 없기 때문이다. 단호하고 엄격한 법 집행을 할 내공, 즉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의 압력을 버티어낼 정신적 무기가 없다. 게다가 눈을 뜨고 있어 온갖 것들에 현혹되고 때로는 엄습하는 공포감을 극복해낼 수 없다. 이 여신상은 '법전'을 품에 안고 있다. 법을 잘 해석하고 적용하기만 하면 정의가 이뤄지고 법관의 소명을 다했다고 보는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나라의 법 전통은 판례나 시민적 상식을 우선시 하는 영미법 계통이 아니라 문자화된 법 규정을 우선시 하는 대륙법 계통이다. 대륙법 계통은 독일법의 영향이 절대적이며 그 전통은 일본 제국주의를 거쳐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 '법전' 즉 법 규정을 우선시하는 우리 사회의 사법부 전통은 바로 여기에 기원한다. 2018년 한양대 박찬운 교수는 이 신상에 대해 "눈을 떴으니 완벽한 공평을 기대할 수 없고, 법률만 읊조리는 책상물림 법관의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서초동 대법원의 여신상은 디케상이 아니라 이를 흉내 낸 선녀같은 이미지다. 초라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빠져있는 것같다. 사실 대법원 홀 높은 곳에 앉아있는 정의의 여신상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종종 제기됐다. 그 이유는 예술작품으로서 가치가 적어서가 아니라 철학적 빈곤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다수가 우리 사회에서 공정하게 법이 집행되고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정의의 여신상을 추하게 만들고 있다.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과 법조인에 대한 신뢰도는 밑바닥 수준이다. 하나의 상징물로서 정의의 여신상은 우리나라 법 정신과 빈곤한 법적 정의를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어쩌면 무력하고 치우친 법의 위상을 고백하는 조형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칼도 없는데 이제는 저울도 잃어버리고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구나 이 여신상은 자리에 앉아 있다. 앉아서 법전과 저울만 만지는 자세로서는 정의를 집행하기는커녕 스스로를 보호하기조차 힘든 것이 아닌가.

물론 동상 하나 바꾼다고 사법적 정의가 저절로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대법원 홀의 정의의 여신상은 이미 죽었다. 심폐소생술이 필요하다. 이 여신상을 소생시키고 다시 일으키는 일은 법원의 몫일 게다. 법원의 권위는 웅장한 건물로 세워지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재판에서 공평무사한 판결이 이뤄지고 있다는 국민적 신뢰의 바탕 위에서 법은 세워진다. 폐허가 되어버린 법원과 이미 쓰러져버린 정의의 여신상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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