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장기업들은 오는 2026년부터 온실가스 배출량을 투자자들에게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하지만 확정된 최종안은 초안에서 한참 후퇴한 내용이어서 반발을 사고 있다. 공화당과 기업들 역시 의무화에 반대하며 법적소송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US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SEC)는 지난 2022년 3월부터 논의해왔던 '기후공시 의무화'에 대해 지난 6일(현지시간) 마지막 표결에서 위원 5명 가운데 3명이 찬성하면서 최종 확정했다. 이에 SEC는 "이 규칙은 투자자들에게 기후위기가 기업에 미치는 위협을 공개하도록 하는 한편 기업이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이 더 투명하게 공개될 것"이라고 밝혔다.
의무 공시내용은 '스코프1(Scope1)'과 '스코프2'다. 스코프1은 기업이 직접 배출하는 온실가스를 말하고, 스코프2는 기업활동에서 간접적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의미한다. 또 오는 2025년부터 허리케인 등 기후재난으로 부동산 자산이 얼마나 피해를 입을 수 있는지 장단기적인 기후리스크도 공개해야 한다. 탄소배출권 구매와 같은 기후목표와 관련된 지출도 명시해야 한다.
그런데 탄소배출 관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스코프3'가 기후공시 의무에서 빠졌다. SEC가 기후공시 의무화 규정에서 '스코프3' 탄소배출 공개를 기업 자율공시에 맡기도록 바꾼 것이다. 스코프3는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유통하고 소비, 폐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의미한다. 게리 겐슬러(Gary Gensler) SEC 위원장은 "현재는 '스코프3' 배출량 공개를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이번 공시 의무화 규정을 놓고 '그린워싱을 부추기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전직 SEC 위원장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규칙의 최종판은 기업의 그린워싱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한탄했다.
의무공시 대상 기업범위도 축소됐다. 초안에서는 "모든 상장기업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보고한다"고 명시했지만, 최종안에서는 기후공시 의무화 대상을 '일정규모 이상의 대기업'으로 범위를 축소한 것이다. 이에 기후활동가들은 "연매출이 12억달러 미만인 소규모 기업 등 미국 상장기업의 60%가 면제대상"이라고 지적했다. 또 초안에서는 기업 이사진의 기후 전문성을 공개하도록 했지만 최종안에서는 이 내용이 제외됐다.
무엇보다 기후공시 내용을 기업이 자의적으로 판단하도록 했다는 점이 '실효성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규정에는 '기업이 자의적으로 온실가스 배출이 투자자나 고객에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경우에만 특정 온실가스로 인한 오염을 공개할 수 있다'고 명시한 것이다. 미 참여과학자모임(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UCS)의 로라 피터슨(Laura Peterson) 분석가는 "사실상 기업의 재량에 따라 보고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SEC '기후공시 의무화' 규정이 초안과 다르게 크게 후퇴한 원인은 최근 미국 정치권에서 ESG(환경·사회·거버넌스) 등 지속가능 금융에 대한 방해 시도가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다. 특히 공화당과 주요 기업들은 "이번 규칙은 SEC의 월권"이라며 대규모 소송을 예고하기도 했다. 실제로 기후공시 규정이 발표된지 불과 몇 시간 후 패트릭 모리시(Patrick Morrisey) 웨스트버지니아주 법무장관은 "공화당이 집권한 9개주가 연합해 법정 싸움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기후단체들은 "해당 규정이 너무 약하다"고 거세게 반발하며 법적대응을 예고하고 있어, SEC는 양측에서 공격받으며 동네북이 될 가능성도 있다. 미 환경단체연합인 시에라클럽(Sierra Club)은 "최종안에서 SEC가 주요 조항을 자의적으로 삭제한 것에 법적이의를 제기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표결에 참여한 캐롤라인 애비 크렌쇼(Caroline Abbey Crenshaw) SEC 위원은 "이번 규정은 말그대로 최소한도를 정한 것"이라며 "위원들 사이에서도 전폭적인 지지가 나오지 못했다"며 후일담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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