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1파운드에 매각된 은행...'썩은 사과'의 교훈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10-03 08:10:02
  • -
  • +
  • 인쇄
'썩은 사과의 법칙'을 알면 위기 막을 수 있어
우리사회와 내 안의 '썩은 사과' 식별·제어해야

'썩은 사과의 법칙'(The Law of the Bad Apple)이라는 유명한 이론이 있다. 썩은 사과 하나가 상자속 모든 사과를 썩게 하듯, 조직이나 공동체에 고약한 사람 하나가 전체를 망친다는 이론이다. "a bad/rotten apple spoils the bunch"(썩은 사과 하나가 전체를 망친다)는 서구 속담에서 기원한 이 법칙은 서구의 리더십 및 팀워크 이론에서 자주 등장한다.

1995년 2월 27일 영국의 탄탄한 투자은행 하나가 파산했다. 1762년 영국 자본주의 초기에 설립된 이 은행은 단돈 1파운드에 매각됐다. 전문가들은 원인분석 과정에서 몰락의 중심에 '닉 리슨'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닉 리슨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비도덕, 불법, 몰상식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나아가 불법 행위도 마다 않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남다른 성과를 내어 경영진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즉 경영진은 그의 전횡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보호한 것이다. 닉 리슨의 부패성에 경영진이 함께 가담해 함께 썩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유구한 역사를 지닌 거대한 은행은 한순간 치욕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통해 '썩은 사과'(bad apple)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언급됐고, 이후 경영학과 리더십 이론에서 널리 연구됐다.

◇ '썩은 사과' 식별하기 쉽지 않아

아시다시피, 썩은 사과는 좀처럼 표가 나지 않는다. 쉽게 구별해 내면 즉각 대응하겠지만 썩어문드러지고 나서야 겨우 알아차린다. 그때는 이미 다른 사과들도 전염되고 부패해 손을 쓸 수가 없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썩은 사과의 특징은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갈등이 끊이지 않게 한다는 점이다. 권력욕이 노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말을 일삼는다. 게다가 교묘하게 위장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에 쉬 식별해 내기가 쉽지 않다. 경영학자 미첼 쿠지와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홀로웨이에 따르면 썩은 사과(the bad apple)는 특별한 행동 유형을 나타낸다고 한다.[참고. <썩은 사과 ; 초일류 기업마저 무너뜨리는 썩은 사과의 법칙>, 예문 출판사]

첫째는 '창피주기'다. 자신이 겨냥한 사람들에게 큰 문제가 되거나 법에 저촉되지 않는 수준에서 미묘한 학대를 일삼는 것이다. 일종의 교묘한 모욕과 갑질이다.

둘째는 '소극적인 적대 행위'다. 부하나 동료에 대한 공격을 일삼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신뢰하지 않고 무시한다. 오로지 자신만이 옳고 자신의 의견과 목적이 최종적으로 관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신의 패거리를 만들고 그 영역을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 음모와 사내정치를 일삼는다. 파벌을 만들고 줄을 세운다.

셋째 '방해 행위'다. 구성원들의 행동을 감시하는데 열중하고, 다른 이의 일이나 협업에 끼어들어 쓸데없이 간섭하고 업무를 방해하기조차 한다. 특히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와 권력을 남용해서 자기편이 아닌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차별하고 배제한다.

문제는 썩은 사과를 알면서도 치울 수가 없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썩은 사과는 조직이나 집단의 실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감히 이의제기를 하지 못한다. 게다가 썩은 사과는 사납고 공격적이다. 깨끗한 사과들은 '무섭고 더러워서 건드리지 말자'는 태도를 보인다. 그런 환경에서 사과 상자는 속에서부터 썩어문드러지고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함께 폐기처분되거나 존립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몇 년 전 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대한항공 회장 일가의 갑질 사건이 또렷한 예다. 회장의 부인과 자녀들이 모두 직원에게 일상적으로 폭언과 갑질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결과 회사의 신뢰도는 추락하고 경영권 위기를 초래하기까지 했다. 썩은 사과가 지도자인 경우 상자 내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

◇ 자기중심성과 권력이라는 바이러스 '부패의 근원'

썩은 사과는 때로는 달콤한 향기를 낸다. 자기 정체를 감춘다. 잘 익은 사과로, 빛깔 좋은 사과로 자신을 위장한다. 썩은 사과로 지목되는 사람은 대개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지각하는 자아 인식과 자기조절 능력이 모두 부족하다. 공감 능력을 발견하기 힘들다. 오히려 자신은 유능하고 최고이며 조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시중에 유통되는 '썩은 사과의 법칙' 사례들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어 보인다. 주로 조직이나 집단 내 숨어있는 썩은 사과를 분별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논조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개 리더는 조직 내의 '썩은 사과'를 총애하고 측근으로 두고 보호한다. 남다른 충성심을 보이고 경쟁력도 강하고 업무처리 능력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윤이나 성과만 추구하는 기업의 경우 이런 사람들이 요직에 등용되거나 오너의 오른팔이 되기 쉽다. 즉 지도자 자신이 썩은 사과를 배양하는 숙주가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리더는 스스로 각성해야 하고 썩은 사과의 치명적인 위험을 인식해야 한다.

문제는 리더 자신이 썩은 사과인 경우다. 구성원 중 영향력이 미미한 한 사람의 부패는 그나마 다행이다. 리더가 부패하고 상식이나 윤리적 원칙에 무감각할 경우 조직의 문화는 근원적으로 뒤틀리게 된다. 우리 사회의 비극은 리더와 리더그룹 전체가 심각한 악취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쉬 치워낼 수가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권력기구나 정당이나 기업이나 온갖 단체들에서 이런 현상이 만연하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무엇이 사과를 썩게 하는가?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권력' 즉 자기 중심성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소중함과 존엄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과 권력과 욕망을 첫째 가치로 두는 사람이 썩는다. 권력의 바이러스, 이것이 가장 감염성 강한 세균일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는 '리좀'(Rhizome)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n-1이라는 유명한 비유를 한 바 있다. n-1을 해야 수평적인 이웃관계가 이뤄지고 더불어 생명을 나누는 삶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n-1이란 n개의 사람들(numbers)로 구성된 연결 관계에서 유일자로 행세하는 number1을 제거할 때 비로소 열린 관계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n-1의 슬로건은 다른 말로 '장군을 제거하라'는 말로 표현된다. 유일자 행세를 하는 이 '1'(the One)은 단지 사람만이 아니다. 어떤 목표, 성과, 돈, 이념, 절대가치, 전통, 규범 등이 절대자 행세를 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리 내부에도 '장군'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든다. 따라서 썩은 사과의 법칙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넌센스다. 나 역시 썩은 사과이거나 썩은 사과 무리의 한 부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나만의 '장군'을 깨우지 말라"고 설파한다. 거시정치 및 경제 사회영역에서의 썩은 사과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솟구치는 미시 파시즘의 충동까지 식별할 일이다.

우리 사회의 문화가 적잖이 우려스럽다.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고 말한다. '살짝 썩은 사과가 오히려 더 맛있다'고 칭송하기조차 한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나에게 떡 한 조각 더 주는 사람이 낫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가 썩어버린 걸까? 하지만 우리는 믿는다. 여러 사과상자들이 썩은 물을 쏟아내고 있지만 우리의 사과밭에서 수많은 신선한 사과들이 자라나고 있다고.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ESG

Video

+

ESG

+

'박스피'에 속타는 기업들...축 처진 주가 살리기에 '안간힘'

주요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주식시장이 휘청거리며 맥을 못추고 있는 가운데 기업들이 자사주 소각, 배당성향 높이기 등 일제히 주주가치 제고를 통한

빙그레, 내년 5월 지주사와 사업회사로 인적분할

빙그레가 22일 열린 이사회에서 2025년 5월에 지주회사 '빙그레홀딩스'와 사업회사 '빙그레'로 인적분할하기로 결의했다.분할 후 지주회사는 신규사업투

SPC그룹, 연말 맞아 임직원 물품기증 캠페인 진행

SPC그룹이 연말을 맞아 임직원들이 함께 물품을 기부해 장애인 일자리 창출을 돕는 '기부, GIVE(기브)해' 캠페인을 진행했다.22일 서울 양재동 'SPC1945' 사

'부당대출' 눈감아준 조병규 우리은행장 결국 연임 실패

손태승 전임 회장의 친인척 관련 부당대출을 알고도 눈감아줬다는 의혹에 휩싸인 조병규 우리은행장이 결국 연임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어난다. 22일

화장품 빈병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 노들섬 설치

화장품 빈병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가 노들섬에 세워졌다.아모레퍼시픽재단은 '다시 보다, 희망의 빛 1332'라는 이름의 공병 트리를 만들어 노들섬

'플라스틱 제로' 선언해놓고...GS25 '초코바' 막대는 플라스틱

'플라스틱 제로'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던 GS25가 아이스크림 막대에 플라스틱 재질을 사용해 빈축을 사고 있다.편의점 GS25는 지난 6월 20일 넷플릭스와 손

기후/환경

+

[COP29] '1.3조달러' 진통끝 합의...구속력없어 이행여부는 '물음표'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가 2035년까지 신규 기후재원을 연간 1조3000억달러(약 1827조원) 규모로 조성하기로 가까스로 합의했다. 1조3000

'최악 스모그'에 파묻힌 인도 뉴델리..."기후변화로 대기질 더 악화"

인도 뉴델리가 학교까지 문을 닫을 정도로 최악의 스모그가 덮친 원인은 기후변화에서 기인된 것으로 분석됐다.22일 인도매체 타임스오브인디아는 인

[COP29] 1조달러 확보 결국 실패?...기후재원 '텅빈' 합의문 초안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에서 1조달러의 신규 기후재원을 확보하겠다는 목표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전망이다. 폐막 하루전 나온 '신

아제르바이잔, COP29.com 도메인 뺏기고 뒤늦게 접속차단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리고 있는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의 공식 웹사이트 주소가 'COP29.com'이 아닌 'COP29.az'가 된 배경에는 환경

거목이 뿌리째 뽑혔다…'폭탄 사이클론' 美서북부 강타

미국 서북부 지역이 10년에 한번 올까말까한 '폭탄 사이클론'으로 쑥대밭이 됐다. 시속 163㎞에 달하는 초강풍에 거리 곳곳에서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고

[COP29] 관광도 NDC 포함되나...'관광분야 기후행동 강화 선언' 출범

전세계 탄소배출량의 8.8%를 차지하는 관광산업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에 포함시켜 정부가 관리하도록 하는 국제 이니셔티브가 추진된다.20일(현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