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큰 변화는 작은 흐름에서 시작된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09-01 09:4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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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가치나 개념보다 구체적 삶이 중요
미시적인 실천들이 모여서 큰 변화 일으켜
▲지난 2019년 열린 기후위기 비상행동 행사현장

"나는 인류를 사랑하는 것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게 더 좋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Wisława Szymborska)의 말이다. 우리는 입으로 인류애를 말하면서 정작 가까이 있는 가족이나 약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구별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 노력하지 않는다. 정의나 평등이나 인권을 외치면서도 직장이나 모임이나 소셜서비스(SNS)에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거나 혐오·차별하기도 한다. 왜 이럴까? 우리의 생각과 몸이 따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고상한 개념이나 추상적 가치를 동의하지만 우리 신체와 행동은 낡은 문화에 의해 길들여진 해묵은 습속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 머리는 알지만 몸은 다르게 움직여

나는 매일 설거지를 한다. 어떤 날은 하루 세 번 이상 싱크대 앞에 선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어쩌다 설거지를 하면 한 여성이 그걸 매우 기뻐하는데다가 다들 대견하게 보아줬다. 그래서 자랑삼아 과시적으로 하곤 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한 평생 요리하고 설거지와 청소와 옷 세탁 등 온갖 가사 일을 하는데 설거지 한 번 한 것으로 생색내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래서 나의 가사 목록에 포함시켰다.

이후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나의 설거지에 대한 인식이 싸악 바뀌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노동 분업이 구조화되고, 임금노동 사회에서 가사노동은 그림자 노동으로 부당하게 대우받는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특히 여성이 가사노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고 남성이 가사노동을 하거나 조금 도와주면 그게 특별한 일이나 시혜적인 행위로 간주된다는 것이 얼마나 허위인가를 인식했다. 머리로는 페미니즘적 사유를 지지했지만 나란 놈은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가부장제 유전자가 깊이 배인 수컷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베트남의 수도자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냑한이 설거지에 대해 한 말을 인상 깊게 읽었다.

"여러분은 설거지를 할 때 잠시 후 마실 차를 생각하거나, 차를 당장 마시고자 설거지를 빨리 끝내려고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 시간을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설거지를 할 때에는 설거지가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어야 한다. 또한 차를 마실 때에는 차 마시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어야 한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신께서는 솥들과 냄비들 사이에 계신다." 그래서 태도를 한 번 더 바꾸었다. 이제 설거지를 좋아한다. 설거지에 점점 능숙하게 되면서 제법 즐기기도 한다. 때로는 수행 같다.

우리는 추상적 가치와 자신의 삶을 연결하는 데 서툴다. 머리로는 동의하지만 우리 몸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자동기계처럼 움직인다. 그래서 자기 성찰이 필요하고, 비판적 사유의 과녁을 자신에게 먼저 향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 민감한 감수성 지닌 사람들이 파장 일으켜

그레타 툰베리는 15세였던 2018년 스웨덴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이 소녀가 스웨덴 정부에 요구한 것은 의외의 것이었다. 2015년 세계 지도자들이 합의한 탄소감축 목표를 이행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매주 금요일 등교를 거부하고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라고 쓴 피켓을 들고 홀로 시위했다. 그녀의 행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지구촌에 퍼져나갔다. 그녀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청소년들이 '#FridayForFuture'(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란 해시태그를 달고 연대 시위를 시작했다.

2018년 12월까지 2만명이 넘는 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그녀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켰고, 기후위기 대응을 요구하는 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2019년 9월 1일에는 161개국에서 400만명이 글로벌 기후파업에 참여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도 5000명이 연대 시위를 했다. 2021년 11월에 영국 글래스고에서는 10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모든 정부들이 유엔기후협약에 따라 책임성 있는 실제적인 조치를 할 것으로 요구하며 시위했다. 지구촌 많은 나라와 도시에서도 연대 시위를 했다. 그들이 호소하는 구호는 명확했다.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 변해야 한다."

우리는 텔레비전 앞에서는 기후위기를 체감하고 염려한다.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는 폭염과 폭우와 산불과 이상기온 등 전례없는 기후위기의 조짐들이 연일 방송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 북극곰이 죽어가고, 남극의 얼음이 녹아내려 어린 펭귄들이 떼죽음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측은하게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기후위기에 대해 청소년들이 지니는 감수성을 동일하게 느끼지 못한다. 파멸처럼 기후재앙이 닥쳐오더라도 그건 나의 생애에 일어날 일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게다가 한국의 날씨는 치명적인 기후재앙을 그리 심각하게 체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인 특히 성인들의 감각은 재앙적 위기의식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2019년 9월, 8세~17세 사이의 기후활동가 16명이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 청원을 했다. 이들은 유엔에 속한 나라들이 기후위기에 개입하지 않는 것은 아동권리 위반이라고 외쳤다. 그 청소년 활동가 중 한 사람은 남태평양 팔라우섬의 카를로스 마누엘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지구를 향유할 권리를 지닙니다. 우리 모두는 그 권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세대는 미래 세대를 위해 기후변화를 막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카를로스 마누엘의 말을 들으면서 제법 놀랐다. 그가 자기 세대가 아닌 '미래 세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미래 세대는 아마 지금 어린아이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세대일 것이다. 이들이 기후재앙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들의 미래만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감수성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우리 보통 사람들이나 지금 각 나라의 정상들이나 기업들이나 주요 탄소배출 국가들의 인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청소년 기후활동가들의 감수성은 우리의 인식을 크게 일깨워 주고 있다. 굳어진 우리의 무감각에 망치질이라도 하는 듯이.

오는 9월 24일 글로벌 기후파업에 맞춰 서울 광화문에서도 3년만에 기후정의행진이 개최된다. 환경단체, 청소년단체, 여성단체, 참여연대, 노동단체 등 230여개 단체가 준비하는 이번 행사는 2만명~5만명이 참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기후정의를 환기시키고 기후대응 정책을 추동하는 도도한 흐름은 기후위기 감수성과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감을 지닌 시민들에 의해 촉발되고 있다.

◇ 미시적인 것이 강하다

우리는 대개 거창하고 고상해보이는 것에 우선 마음이 끌린다. 이에 반해 작고 소소한 일들을 소홀히 여긴다. 거시적인 것은 미시적인 것과 연결될 때 온전해질 수 있다. 기후위기는 환경보존과 탄소저감을 위한 일상의 작은 실천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민주주의 담론에 대한 관심이나 사회정치적인 변화를 위한 행동과 함께 일상의 삶 속에서 민주주의 실천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일, 수평적인 관계맺기, 아동이나 장애인이나 이주민들의 인격과 권리 존중하기, 비폭력적 대화, 혐오와 차별과 갑질에 공조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하고 시정하는 일 등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거시적 참여와 미시적 실천은 서로 이어진다. 거시적 흐름과 의제는 우리의 미시적 감각을 민감하게 만들고 참여하게 한다.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이 함께 움직일 때 변화가 일어난다.

메타 이론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져서는 곤란하다. 거시정치는 미시정치와 결합해야 한다. 전지구적 담론이나 정치적 의제만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마을과 아파트 단지의 의제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 세상에서 내가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실제적인 파장은 작고 소소한 실천이다. 미시적인 것은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한 것이다. 이러한 작은 마음과 실천들이 모여 큰 변화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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