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과연 강해야만 살아남는가?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07-20 08: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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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세계와 사회적 곤충은 '공존의 지혜'
'관계가 노동'인 삶에서 손 맞잡는 관계로

"지쳤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넌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하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했던 건 다 그런 눈빛이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만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 어디서 답을 찾아야 할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주인공 염미정(김지원 분)의 독백이다. 도시의 어둠 속을 쓸쓸히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슬펐다. 이 드라마가 시청자의 큰 사랑을 받은 것은 단지 주인공의 연기력이나 서사가 주는 재미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정곡을 찌르는 대사, 심금을 울리며 우리 삶의 현실을 콕 짚어서 공감하게 만드는 언어들이 낚시바늘처럼 우리 마음을 움켜쥐었다.

'모든 관계가 노동'이고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라는 표현은 기발하다. 극단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이를 자신의 고백으로 느낀다. <나의 해방일지>는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며, 우리 삶을 그대로 담은 논픽션이다. 우리는 노동인 관계에 지쳤다. 종속을 강요하는 관계, 품질을 관리해야 하는 몸짓,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고 차별하는 온갖 시선들에 신물이 났다. 경쟁하는 삶, 서바이벌 게임같은 세상이 한없이 피곤하다. 강해져야 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밀려나게 되는 이 현실이 버겁다. 함께 공존하며 살아갈 순 없을까? 이타적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갈 순 없을까?

◇ 이타적으로 협력하는 개미 사회

헬레나 크로닌의 <개미와 공작>은 '이타주의' 주제를 명쾌하게 해부한 역작으로 꼽힌다. 이 책은 진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이를 다룬다. 다윈이 진화론을 연구하면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 난제를 붙잡고 씨름했다. 하나는 왜 생물들은 이타적일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종을 살리려 할까? 라는 질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왜 생물은 암컷과 수컷 혹은 남(male)과 여(female)로 나뉘는가 하는 수수께끼다.

크로닌은 개미와 공작을 예로 든다. 개미는 극단적으로 이타적인 종이다. 개미는 사회적 곤충이다. 여러 개체가 군집을 이뤄 살아가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개미처럼 엄청난 규모의 군집을 이루며 지구촌 모든 곳에서 번영을 이루는 종은 드물다. 개미 사회는 철저하게 분화된 협업을 하며 이타적 방식으로 살아간다. 심지어 인간보다 개미가 더 사회성이 강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 하나의 예는 공작이다. 공작은 개미와 상당히 대조되는 특성을 보인다. 공작의 수컷은 지나치게 화려하다. 날개가 크고 무거워 날아오를 때에도 힘겨워 한다. 포식자에게 노출되어 먹이가 되기도 쉽다. 수컷 공작의 날개와 꼬리의 화려한 색체와 문양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다. 생명체의 일차적인 본능인 번식, 즉 짝짓기를 위해 발달한 것이다. 크로닌은 공작을 성 선택의 대표적인 동물로 소개한다.

지구상에서 이타적으로 협력하면서 살아가고 번영을 이루는 대표적인 생물로 개미, 벌, 식물을 들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이해할 때 이를 '약육강식'으로 오해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논리로 말한다. 이는 경쟁주의와 승자독식주의의 해석이다. 사실 적자가 항상 강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크로닌의 연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오히려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생명체가 잘 번식하고 번영한다.

◇ 이타적으로 공존하는 식물의 세계

식물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호혜적 공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산책하는 숲이나 공원, 남미의 정글이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도 식물들은 공존한다. '세 자매 농법'에 대해 읽었다. 이는 중앙아메리카 인디언의 농법이다. 세 자매란 호박(squash, pumpkin), 옥수수(maize, corn)와 콩(bean)이다. 이들 작물은 자매처럼 친하고 서로를 돕는다. 세 자매 농법은 호박과 옥수수, 콩을 한 밭에 섞어짓기하는 방식이다. 놀랍게도 이 세 작물을 섞어 재배하면 각각 심는 것보다 수확량이 더 많고 맛과 질도 훨씬 좋아진다고 한다. 그 결과 고대 인디언들은 농경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해 생산량을 극대화했다.

식물의 삶의 방식의 핵심은 생존에 있다. 일부 탐욕스런 인간들처럼 모든 것을 장악하려거나 승리의 전율을 느끼기 위해 경쟁하지 않는다. 식물은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식물의 세계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이미지와 가치는 생존, 번성, 공생, 협력, 소통 등이다.

오래전 가족과 함께 세쿼이아(Sequoia) 국립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거기서 목격한 세쿼이아 나무의 웅장함과 기세는 나의 상상력을 한참 뛰어넘었다. 나무의 키가 90미터나 된다. 30층 아파트 높이다. 큰 걸음으로 밑둥치 둘레를 돌며 어림 그 길이를 재어보았다. 25걸음이 나왔다. 나무 하나를 쓰러뜨리면 축구장을 다 덮게 되는 크기다. 그래서 자이언트 세쿼이아(Giant Sequoia)라고 부른다. 이렇게 나무가 거대하게 자라는 것은 태평양에서 몰려온 구름이 높은 휘트니산(Mount Whitney)에 걸려 많은 비를 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외로 나무의 높이에 비해 뿌리가 깊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세찬 폭풍이 몰아닥쳐도 나무들이 넘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를 조사했더니 세쿼이아 나무뿌리가 엉켜 서로를 붙잡아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숲은 모든 나무가 사실상 하나의 공동체였던 것이다.

◇ 경쟁과 승자 독식은 이제 그만

인간 역시 대표적인 사회적 동물이다. 호모사피엔스는 언어와 문자를 통해 소통을 고도화하고 기술을 발달시켜 지구 최강의 포식자가 됐다. 그렇지만 마냥 인류의 행태를 예찬할 수 없다. 그간 인간은 자연을 무참하게 파괴하고 지구(땅)를 약탈해 왔다. 개발 혹은 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행한 일이다. 게다가 인간 사회 내부에서도 살벌한 생존 경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은 이를 보다 극단화해 이제 1%의 사람이 지구의 땅과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서구에서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근원적으로 무너졌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며 실로 야만적이라는 걸 자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침략 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온갖 이념적 경쟁과 증오, 편 가르기와 차별이 진행 중이다. 상생하고 공존하기 위한 노력은 예외적일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 식물과 동물의 세계로부터 배워야할 때다. 상생의 가치를 발견하고 공존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다행히도 생태적 가치, 공동체의 정신, 공유의 정신, 연결의 힘을 추구하는 크고 작은 흐름들이 생겨났다. 지구환경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전지구촌의 연대의 흐름도 도도하게 일어나고 있다. 더구나 인터넷과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로 급격히 도래한 초연결사회는 '공존과 상생'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주고 지구촌 시민들의 집단지성의 힘을 크게 도약시키고 있다.

인간 사회의 가치 생태계가 변하고 있는 조짐들이 보인다. 이제 기업들도 공익적 가치를 추구하고 이타적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사회적 책임은 이제 비즈니스의 상식이 됐다. 과거처럼 수직적 위계조직일수록 생산성이 떨어지고 제왕적 리더십이 단숨에 몰락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협업과 콜라보, 에자일(agile) 조직과 유연하고 자치적인 생산 활동이 장려되고 있다. 플랫폼 사업의 경우 이타적이지 않을 경우 사업 자체가 불가능하다. 서비스업이나 문화예술 활동, 개인 사업, 프리랜서의 경우에도 이타적일수록 연결이 잘 되고 보다 활기차게 성장하게 된다. 즉 퍼주고 남을 도와주어야 더 잘되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남이란 추상적인 타인이 아니다. 고객, 거래처, 콜라보 상대만이 아니라 동료와 직원, 여성과 소수자와 약자들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 타인에 대한 존중과 협력, 환대와 봉사라는 인문학적 가치가 기본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생태 환경과 동물들을 배려하는 감각까지 요구되고 있다.

요르단과 이스라엘 접경에 있는 사해 바다는 지구상에서 소금 농도가 가장 짙은 내륙 호수다. 요르단 강을 타고 올라가면 갈릴리라는 큰 호수가 있다. 갈릴리는 헬몬산(Mount Hermon)의 눈이 녹아 흘러들어온 맑은 물을 받아 요단강으로 내보낸다. 이 호수에는 37종의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사해와 갈릴리는 흔히 나눔과 상생의 비유로 언급된다. 갈릴리 호수가 생명력으로 충일한 것은 물을 받기만 하지 않고 내보내기 때문이다. 반면 사해는 갈릴리의 물을 받기는 하지만 흘러 보내지 않는다.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나눌 줄 몰라서 짠물이 되었고 죽음의 바다가 되었다. 최근 사해의 증발 속도가 높아져 수면이 크게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 원칙은 얼핏 서구인의 삭막한 거래 관계의 이미지를 자아낸다. 사실 기브앤테이크는 기본이다. 주고받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정도의 상호 호혜적 주고-받음만 이뤄져도 참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그 출발점은 'giving'이다. 움켜쥐려 들기보다 손을 펴는 것이 먼저다.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미는 것이 순서다. 깍지 낀 관계가 되어 서로 신뢰하며 상생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많든 사람들이 어깨동무하고 함께 나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다. 이타성은 이기주의와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인 사람이 연결될 때 상생한다. 이타성은 이제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태도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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