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나무들을 심을 땅이 필요해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11-08 08:30:02
  • -
  • +
  • 인쇄

날 것의 소설이다. 우리 시대의 초상을 생생하게 그린, 남도의 한(恨)을 문자 속에 담아내어 증언하는 비극적 서사를 읽으며 독자들은 고요히 전율하게 된다. 소설 속 화자의 감정이나 등장인물들의 고통에 공감한다면 그 슬픈 정서에 전이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책을 빨리 덮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우리는 <작별하지 않는다>와 가볍게 작별할 수 없다.


◇ 아마, 내가 살리러 왔어

소설 속 화자 '나'(경하)는 친구 인선의 부탁으로 제주도의 인선의 집으로 찾아간다. 입원한 인선은 한 달 간 집을 비웠고 앵무새 '아마'는 아마 목말라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밤 인선의 집에 도착하자 앵무새가 앉는 횃대는 텅 비어있고 새장 안의 물그릇도 비어 있다. 아마가 그 옆에 쓰러져있다. '내가 살리러 왔어. … 움직여 봐. 내가 구하러 왔어.' 경하는 아마를 고이 감싸안고 상자 안에 넣어 언 땅을 판 후, 구덩이에 매장해 장례를 치른다.

"희끗한 표면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두 손으로 흙을 떠 넣는다. 좀 전에 파냈던 흙을 삽으로 퍼서 덧쌓고, 힘껏 손바닥으로 다져 작은 봉분을 만든다." 155쪽

아마와 이별하는 성스러운 의식, 이 장면은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가 암시하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작별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앵무새의 이름은 '아마'다. 한국어 '아마'의 어감과 의미는 우리에게 기묘한 울림을 준다. 과거를 가리키는 걸까? '아마, 사실이 아닐 거야.' 미래의 어떤 날에 대해 신호를 보내는 걸까? '아마, 그날이 올 거야.' 진실이 밝혀지는 날, 아니면 유해들을 낱낱이 되찾아 정성껏 매장하는 그런 날 말이다.

◇ 작별하지 않는다

숲 속에 있는 인선의 집에는 공방이 있다. 목공 작업실 내벽에는 서른 그루 남짓한 통나무들이 차곡차곡 세워져있다. 공방 외벽에 쌓여져 있는 것까지 합하면 백 그루가 넘는다. 경하는 인선에게 함께 무언가를 해보자며 어떤 프로젝트를 제안했었다. 함께 통나무를 심어 먹을 입히고, 눈이 내리길 기다려 그걸 영상으로 담아보면 어떻겠느냐고. 인선이 먼저 그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얀 눈이 덮인 검정색의 등신대는 단지 흑백의 이미지 대조만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자아내는 표면효과를 일으킨다. 등신대(等身大)는 사람의 크기와 똑같은 크기를 말한다. 사람 크기의 검은 나무들이 찬 눈을 맞고 있다. 뿌리와 가지들이 잘린 채 검은 형상으로 서 있다. 망자들과 망자들의 죽음을 추념하는 것일까. 언젠가 인선이 경하에게 자신들의 프로젝트의 이름을 묻자 경하는 이렇게 대답한다. "작별하지 않는다."(192쪽)

소설의 처음부터 나무 이미지가 등장한다. 경하는 꿈을 꾼다. 산등성이에서 들판 아래쪽까지 이어져 있는 수 천 그루의 통나무들이 심겨져 있다.

'침목처럼 곧지 않고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어서, 마치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아이들을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9쪽

공방 벽에 기대어있는 검은 통나무들을 바라보는 경하의 마음이 일렁거린다.

"조금씩 다른 농도로 칠해진 그 검은 나무들이 어떤 말을 하는 것 같다고 나는 느낀다. … 칠하지 않은 생나무들은 표정도 진동도 없는 정적에 잠겨 있는데, 이 검은 나무들만이 전율을 누르고 있는 것 같다." 145쪽


소설 말미에서는 나무들의 침묵이 말한다.

'무엇이 지금 우릴 보고 있나, 나는 생각했다. 우리 대화를 듣고 있는 누가 있나.
아니, 침묵하는 나무들뿐이다.
이 기슭에 우리는 밀봉하려는 눈들뿐이다.'320쪽

◇ 아무도 믿지 않는다

나무들은 절멸 당했다. 그 나무들은 검게 칠해져 있고 눈도 입도 가려져 있다. 절멸을 목적으로 진행된 사냥을 통해 학살된 양민들, 그들의 시신은 집단으로 매장되고, 갱도에 묻히기도 하고, 바닷물에 떠내려갔다. 그리고 누구도 그 일을 입에 떠올릴 수 없었고, 누군가 말하여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봉인되고 오래 잊혀졌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G.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도 대학살 이야기가 등장한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마을 마콘도에 미국의 바나나 회사가 들어서면서 현지 주민들은 착취적인 노동 조건 속에 일하게 된다. 벌목도를 휘두르는 직업적인 암살자들이 노무관리를 하고, 위생과 노동 조건이 최악이었으며, 심지어 현금이 아니라 회사의 구매소에서나 햄을 살 수 있는 배급표를 임금으로 지급했다.

노동자들은 임금과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대파업에 나서고, 이에 회사는 군대를 동원해 시위 진압을 시도한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대는 역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을 포위한 채 기관총을 난사한다. 3000명이 죽임당했다. 이 이야기는 콜롬비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살육당한 시신들은 200량 길이의 기차에 실려 한밤중에 어디론가 실려간다. 시체 더미 속에서 의식을 회복한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마콘도로 되돌아간다. '학살이 일어났던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동생을 만나 그 사실에 대해 말한다.


"그는 형의 얘기를 듣고도 학살 사건이라든가 시체 더미에 묻혀서 기차에 실려 바다로 갔다는 악몽 같은 여행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문학사상사, 344쪽

아무도 말할 수 없었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317쪽

알다시피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도의 4.3이라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을 다룬다. 한강은 왜 이토록 집요하게 죽음 서사에 집착하고 대학살과 국가 폭력이라는 예민한 주제를 건드리는 걸까? 마치 희생자 가족의 트라우마를 똑같이 경험하고 있다고 여겨질 정도다. 진실이 더는 은폐되지 않기를, 그 비극이 망각 속에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일까. 어쩌면 소녀 한강이 그 죽음 사건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는 버려진 고독이 되지 않도록, 기억을 통해 연대하면서 펜을 들고 문학으로 기억의 등신대를 세우는 작업을 하는 것일 게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를 어떤 곳으로 데려간다. 인선은 경아에게 함께 '나무들을 심을 땅'으로 데려간다. 집 가까이 숲 속에 있는 땅인데, 두 사람은 눈과 어둠 때문에 힘겹게 다가간다. 건천을 지나야 하고, 촛불을 켜야 한다. 종이컵 속의 촛불이 깜박이더니 꺼져버린다.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325쪽

나무들을 심을 땅이 필요하다. 촛불도 필요하다. 길을 여는, 어둠을 밝힐, 함께 기억하고 추념하는.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매출 9.5조 포스코이앤씨 면허취소?…사고많은 건설업계 '초비상'

연매출 약 9조5000억원에 달하는 국내 건설업계 7위인 포스코이앤씨가 창사 43년만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렸다.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적으로 중대재

LS그룹, 41년째 '무사고·무재해' 비결은?

LS가 2021년부터 ESG위원회를 지주회사 내에 출범시키며 지속가능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6일 밝혔다.위원회는 ESG 방향성 정립과 정책 변화 대응,

AI로 탄소배출 '폭등'…빅테크 '넷제로' 목표 사실상 물 건너갔다

구글과 아마존 등 주요 기술기업들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최근 급증하면서, 이들이 공언해온 '넷제로' 목표가 사실상 무력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기후

Z세대, 기업 ESG활동에 민감...67% "비싸도 ESG 실천기업 제품 구매"

Z세대는 개인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소비를 결정하는 이른바 '미닝아웃(가치소비)'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6일 대한상공회의소가 공개한 'ESG 경

네이버, 유럽 AI커머스 발판 마련...스페인 '왈라팝' 경영권 인수

네이버가 스페인 최대 중고거래 플랫폼 '왈라팝'의 지분 70.5%를 3억7700만유로(약 6045억원)에 인수하기로 5일 결정함에 따라 유럽의 AI 커머스 거점을 확

동원산업, 동원F&B 100% 자회사로 편입 완료

동원그룹의 지주사 동원산업이 포괄적 주식교환을 통한 동원F&B를 100% 자회사로 편입하는 절차를 완료했다고 4일 밝혔다. 동원그룹은 지난 4월 동원

기후/환경

+

"탄소 저장해드립니다"…노르웨이 'CCS' 사업에 33억불 투자

북유럽 국가 노르웨이가 최근 북해 해저에 이산화탄소를 영구 저장하는 '노던라이츠(Northern Lights)' 사업에 33억달러(약 4조5800억원)를 투입했다. 석유개

급류에 마을이 통째로 휩쓸려...히말라야 산간마을 '돌발홍수'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간마을에 갑자기 홍수가 발생했다.6일(현지시간) AFP 통신과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전날 인도 북부 우타라칸드주 히말라야 인

'괴물폭우' 예보됐는데…'띠모양 비구름대'로 기상 예측불허

'괴물폭우'가 내린다던 예보와 달리 서울 도심에는 새벽에 잠깐 강한 비가 내리다가 그쳤다. 반면 수도권과 가까운 경기북부와 강원 지역에는 시간당 3

[르포]사과 5알에 1만6000원?...폭염·폭우에 과일·채솟값 '껑충'

폭염·폭우 등 이상기후 영향으로 농산물 가격이 크게 올랐다. 치솟은 물가는 6일 뉴스트리 취재진이 찾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마트에서도 고

'폭염↔폭우' 교차하는 이상기후...원인은 '해수온 상승탓'

올여름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나타나는 이상기후가 이어지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이달 3일 광주와 전남, 경남 등 우리

"숲가꾸기 정책 개선해야"…전문가들 산림정책 전환 '한목소리'

국회에서 열린 산림정책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지금처럼 운영되는 숲가꾸기 정책은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국회 산불피해지원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