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운명의 굴레' 순응하는자, 벗어나는 자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3-01-13 13: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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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주어진 환경과 영향 벗어나기 어려워
다른 삶 선택하는 자가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나를 둘러싼 삶의 환경이 나를 만든다. 나의 자아, 가치관, 행동 스타일, 성격, 방어와 공격 유형, 기쁨과 슬픔의 정서와 그 표현 등 모든 것에는 나의 경험과 기억이 배여있다. 특이한 경험은 특이한 삶의 스토리를 만든다. 상처와 누적된 트라우마는 한 사람이나 집단을 비극적인 서사로 몰고 가기도 한다. 반대로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이들도 있다. 두 여성의 이야기가 겹쳐서 떠오른다.

◇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삶의 환경

한 여성이 딸 아홉을 낳은 후 마침내 고대하던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성장해 결혼을 했다. 이후 여러 사정이 있어 이 여성은 아들 부부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한 학자가 연구를 위해 여러 가정들을 만나 노인들을 인터뷰하던 중 이 할머니와 대화를 하게 됐다. 이 할머니는 며느리에 대해 이 말을 툭 던졌다.

"걔와 난 천지지차(天地之差)지."


시어머니인 자신과 며느리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이다. 이 말을 들은 학자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며느리와 자신의 관계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등급으로 규정하는 이 말을 거듭 사유했다. 무엇이 이 할머니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갖게 했을까? 그 삶의 경험이 그런 인식을 몸에 새긴 것일 게다. 며느리의 자리에서 겪은 마음 고생과 기적적으로 아들을 얻고 나서야 삶의 족쇄로부터 벗어난 느낌 등을 나는 상상했다. 이 할머니의 말과 생각을 함부로 평가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 배후엔 굳어진 가부장제 문화와 남아선호사상이 깔려 있었다는 점을 짚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이었을 것이다. 한 여성을 둘러싼 정황과 특이한 경험이 그의 삶과 사유를 특정 방향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닐까.

◇ 전통적인 삶을 거부한 여성

버지니아 울프가 찬양했던 한 여성이 있다. 그녀 이름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 런던의 실크 직조공인 그녀의 아버지는 늘 술에 찌들어 살았다. 우글거리는 형제들 사이에서 자란 그녀는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여성은 대부분 교육에서 배제됐고 교육받을 돈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독하게 공부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책과 고학과 넘치는 삶의 모험이었다. 그녀는 여성이 독립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경제적 능력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정교사로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글을 썼다.

1788년부터는 런던에서 발간된 당대의 저명한 잡지에 서평, 번역문, 에세이 등을 기고하면서 저술가로 활동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치마를 입은 하이에나'라는 별명이 붙였다. 그만큼 비평의 촉이 날카롭고 글이 신랄했기 때문이다. 상당한 지성과 역량을 확보한 그녀는 사립 여학교를 열었다. 나중에 이 학교는 문을 닫게 됐지만 그녀는 넓은 인맥을 얻게 됐다. 그 인맥으로 파리로 건너가 프랑스혁명의 흐름을 접하고 잇달아 책을 썼다. 그녀가 쓴 <여성의 권리 옹호>는 페미니즘의 선구자적 저서이기도 하다. 소설 <메리, 하나의 픽션> 등을 통해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그녀는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루소의 여성관을 비롯해 당시 중산층 여성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자신의 이성을 입증할 수 있는 타고난 권리를 포기했고, 평등에서 나오는 소박한 기쁨을 추구하기보다 덧없는 (아름다움의) 여왕이 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전통적인 여성의 삶을 거부했고 직접 모험에 뛰어들었다. 미국 남성과 사귀다 혼외자를 낳았고, 그 아기를 데리고 스칸디나비아로 건너가 또 한 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녀는 한 남성과의 안정적인 관계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그녀의 스타일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꿈의 남자를 만났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과 결혼한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자유를 보호하고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경계를 정해 각자의 집에서 살았다. 슬프게도 그녀는 딸을 낳다가 사망했다. 그녀의 딸 이름은 메리 셸리(Mary Shelly), 그 유명한 <프랑켄슈타인>을 쓴 작가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삶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는 모험과 실험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줄곧 실패의 의지를 지니고 도전했다.

두 여성의 이야기를 곧바로 대조할 수는 없다고 본다. 시간적 격차와 문화적 차이와 각 이야기의 세부적 스토리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넘어서지 못하는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거나, 그걸 극복하는 것은 고스란이 여성의 몫이라는 해석 역시 얼토당토 않다. 

분명한 것은 나 자신을 둘러싼 삶의 환경이 나를 형성하고 만든다는 사실이다. 출생지, 언어, 문화, 계급계층, 신체능력, 가족 등의 조건은 사실 나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것이 100%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실천으로 그 힘을 벗어날 수도 있다. 거시적인 틀에서 보면 구조의 힘은 규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삶은 잠재성으로 충만한 열려있는 대지와 같다. 우리 각자가 처한 삶의 환경이나 삶의 경험치가 다르고 각자에게 주어진 백지와 여백의 크기 역시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나의 이야기를 새롭게 쓸 수 있다.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도전하는 삶을 선택하는 자는 운명을 탓하지 않는다. 삶의 주인공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이라는 작품은 내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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