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시간의 덫에 걸린 사람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12-20 1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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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의 마법, 매일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
삶의 흐름을 따라 의미 있는 시간 창조해야

며칠 전 어느 송년회 모임에서 시간에 맞춰 참석한 이들이 늦게 오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0분 정도 지났다. 어느 한 분이 말했다. "그냥 시작하시죠!" 지난달 공부 모임에서도 다들 지각하자 그 분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지났으니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분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언제나 약속한 시간을 지나 모임을 시작하는 '코리안 타임', 지각을 당연시 하고 적당하게 배려하는 것이 필수적인 되어 무기력해져버린 공지된 시간, 누군가 그렇게 지적해 주면 신선하고 고맙다. 그분 성격이 그리 깐깐한 사람이 아니다. 공적 모임이라면 정시에 시작하는 문화를 만들기를 원하는 것이다.

◇ 시간은 금? 그 숨겨진 주술

인간은 시간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시간을 세분화해 관리한다.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는 시간 감각이 더 예민해진다. 누구나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새해를 다르게 꿈꾸고 준비한다. 많은 이들이 새해 첫날의 일출을 보는 해맞이 의식(ritual)을 행하기도 한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고 그것을 양으로 측정하고 적절하게 관리하려 한다. 그리고 무언가 다른 시간이 되기를 갈구한다.

인간은 해가 뜨고 지는 주기로 하루를, 보름달이 뜨고 다시 뜨는 주기를 기준으로 한달을 측정했다. 이런 주기는 하루의 일상 및 농경 사회의 농사 일정에 조응한다. 시간의 계보를 추적해보면 시간관리 개념은 노동의 통제와 밀접하다. 농부들은 계절에 따라 씨를 뿌리고 거둬야 했다. 노예 혹은 농노는 주인에 의해 시간과 신체가 통제되면서 많은 시간을 일해야 했다.

시계의 발명은 이를 촉진시켰다. 시간 개념이 정교해진 것은 자본주의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한다. 시계는 하루를 12시간, 1440분, 86400초로 세분화했다. 노동에 대한 임금은 시간단위로 계산된다. 시간은 곧 금이 됐다. 이는 문학적 은유를 넘어 윤리적 강제에 가깝다. 그 결과 시간을 관리하는 사람은 경제적이고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시간 관리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으로 치부됐다. '시간은 금'이라는 금언은 모든 사람을 시간의 노예로 묶는 내면의 주술이 됐다.

◇ 시간의 관리에서 시간의 독재로

그 정점에 있는 것은 20세기말 유행하기 시작한 바인더형 플랭클린 플래너다. 이 스케쥴 관리용 다이어리는 경영자와 비즈니스맨에게 시간 관리의 바이블로 자리잡았다. 다양한 시간관리용 수첩들이 있지만 대개 시간을 20분 혹은 30분 단위로 쪼개 하루 일과를 관리하도록 안내한다. 그리고 오늘의 '주요 업무'를 먼저 기록하고 처리하게 만든다.

오늘날 시간관리의 격률은 그의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First Things First)는 명령어에 집약돼 있다. 자기 개발 전도사이며 시간경영의 사제가 된 스티븐 코비의 책 제목이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무난한 것은 가장 나쁜 악덕이며 '개인성실성 계좌'를 관리하는 사람이 곧 완성된 인간이다. 이 계좌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뢰를 좌우하고, 말을 실천에 옮기는 능력을 측정하는 지표가 된다. 결국 계좌를 잘 관리하는 자가 이상적 인간이며, 그 관리 능력에 따라 부자가 되고 성공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제 스케줄 관리수첩을 따로 구입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됐다. 스마트폰마다 다이어리 앱이 깔려있고, 알람이 미리 일정을 알려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벽/아침 알람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일터로 향한다.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모자라는 잠을 껴안고 공부하러 혹은 일하러 간다.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는 주부는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 뿐만 아니다. 우리는 종일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한다. 항상 시간에 쫓기며 산다. 늘 시간이 모자란다. 심지어 잠자리에 누워있거나 여유롭게 쉬고 있으면 절로 불안해진다. 그 시간은 죄인의 시간이 된다.

국내 굴지의 은행 고위 간부가 퇴직을 했다. 평생 처음 자유로운 시간이 생겼다. 이제 여행도 즐기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동해 바닷가로 가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숙소에서 바라보던 바다가 더이상 예전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그 바다가 아니었다. 거기 머무는 시간이 죽음처럼 고통스럽고 힘겹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다음날 짐을 싸들고 서울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그분은 해외로 가서 은행 일을 했다.

현대인의 시간은 경제적 시간이요 효율성으로 평가되는 시간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남성의 시간이다. 육아와 가족돌봄을 하는 여성들의 온갖 가사노동은 그림자 노동이 되어버린다.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노동이란 이유로 그 노동은 하찮은 노동이 되고, 그 가치가 인정되지 않고, 취업하지 않은 여성의 모든 시간은 죄의 시간이 된다. 이처럼 시간은 타인을 유능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 가치있는 사람과 무가치한 사람,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으로 구별하고 평가하는 척도가 되어 버렸다. 시간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에 맞춰 노력할수록 시간의 노예가 되고 시간의 독재가 만연해진다.

◇ 시계의 시간을 삶의 시간으로

오늘날 우리의 시간 감각과 사뭇 다른 시간관들이 과거 인류사에 존재했다. 그 하나는 동양의 시간관이다. 서양문화와 달리 중국의 사고에는 '공간'이나 '물질'처럼 확실하게 나눌 수 있는 추상적 시간 개념이 없었다. 우리 민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간은 특정 방향으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다. 그 시간은 되돌아온다. 이 시간은 자연의 시간이자 삶의 시간이다.

둘째는 고대 그리스의 시간 개념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시간을 지칭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었다. 그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이다. 전자는 물리적 시간이다. 측정할 수 있고 관리가 가능한 시간, 요즘 말로는 객관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심리적 혹은 경험적 시간이다. 이는 자기 자신 혹은 공동체에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시간을 말한다. 카이로스의 어원은 '새긴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 시간은 의미적 시간이요 질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진 시간, 재난과 전쟁, 예술적 경험의 순간, 축제의 시간 등 사람들이 특별하게 경험하는 시간과 순간들이다. 몰입의 순간, 자유의 경험, 황홀감이나 고요함 혹은 편안함을 향유하는 순간도 이에 해당된다.

셋째는 유태인의 시간관이다. 유태인에게는 시간에 대한 어떤 특이한 감각이 있다. 그것은 ‘희망’에 대한 숨겨진 기호와 이에 대한 열망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시간은 직선적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시간의 종국에 개벽과 같은 어떤 격변이 일어난다. 그 시간은 메시야의 도래로 기존의 시간의 흐름을 엎어버리고 모든 것을 재구축하는 전혀 새로운 시간이다. 발터 벤야민이 비유했듯이 '별빛들이 하나씩 모여 어느 순간 빛나는 성좌가 되는 그런 순간'이다. 수 천 년 간 무국적자요 난민으로 살아온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이 이런 시간관을 형성하게 한 것일 게다. 이러한 시간관은 유대-그리스도교 전통과 맑스주의 사유에서 두드러진다. 시간의 전복과 세상의 변혁을 꿈꾼다는 면에서 유사한 역사철학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간관은 우리에게 본래적 시간을 복원해준다. 이 세 종류의 시간을 삶의 시간, 의미의 시간, 희망의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삶의 흐름에 주목하면 시간의 강박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기계적 시간을 벗어나면 삶이 흐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를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다. 먼저 느림을 선택하는 일이다. 곡식 줄기를 잡아당긴다고 더 빨리 자라지 않는다. 시간을 재촉한다고 일이 더 잘되는 것도 아니다. 더 고통스러울 뿐이다. 산책자의 마음으로 하루를 살 일이다. 그리고 포기하는 법을 알면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어딘가 뛰어드는 순간 우리는 그 일의 흐름과 시간의 강제에 여지없이 포박 당한다. 지금 당장 그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미팅을 잡거나 모임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조금씩 작업하는 장인이나 예술가처럼, 초원을 느리게 이동하며 가로지르는 유목민처럼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의미있는 시간을 생산하고 향유하는 일이다. 이것이 아마 시간을 초월하는 비법일 것이다. 좋은 시간은 돈이 되는 시간이나 쾌감을 느끼는 순간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시간, 강요된 삶에서 해방되는 상태가 진짜 시간이다. 시계 보는 습관만 버려도 삶이 넉넉해지고 편안해진다. '시계' 장치의 톱니바퀴로 짜진 근대적 시간을 내던지기로 결심하면 새로운 시간이 열린다. 그간 알지 못했던 경이로운 순간이 열린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꽃받침, 꽃잎, 가시
어느 여름날 아침에 -
이슬 한 접시 - 벌, 한 마리나 두 마리 -
한 줄기 미풍 - 바스락대는 나뭇가지 -
그리고 나는 장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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