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사면의 정치, 사면의 윤리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1-12-27 1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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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끌어내린 대통령, 국민동의 없이 사면
시민 공론화 과정 거친 사면 '언제쯤 실현될까'
▲보수성향 시민단체 회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입원 중인 삼성서울병원에서 특별사면을 환영하는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면(赦免, amnesty)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사면은 흔히 남아공의 우분투(Ubuntu)처럼 역사적 미담이 된다. 진실과 화해라는 가치에는 누구든 공명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면이 오히려 이질적이고 복잡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사면' 선언은 법과 정치, 용서·화해와 같은 심리적 현상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2022년 신년특사로 행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 조치가 현재 여러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사면이 미담으로 남게 될까? 아니면 정반대의 평가를 받게 될까? 이를 추적하며 몇 가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사법적 정의를 정면으로 훼손하는가

첫번째 질문은 사법적 정의와 관련된 것이다. 사법부는 죄를 선고하고, 사면권자 즉 권력자는 면죄를 선언한다. 사면이 단행되는 순간 처벌은 중단되고 죄는 무효화된다. 사면권자의 한 마디 선언으로 사법적 정의가 단숨에 와해되는 듯이 보인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사면은 법적 정의를 넘어서고, 처벌이 가져다주는 형법적 효과보다 높고 큰 가치를 추구한다. 그것은 아마 화해와 통합이라는 사회적 가치와 관련된다. 법의 정신을 넘어서는 어떤 윤리적 차원이 사면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사면권이 남용되거나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할 때 설득력을 잃게 된다. 사면권이 정치적 도구로 구사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사면 권한의 남용을 막는 장치가 필요하기도 하다. 특히 쉽게 사면할 수 없는 범죄의 경계를 정할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 사면이 국정농단에 대한 사회적 법적 심판을 내린 우리 사회의 사법적 정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국민의 보편적 동의에 기반하고 있는가

둘째는 국민의 정서와 관련된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들고 일어난 촛불 시위에 의해 대통령직이 파면되고 형사 처벌을 받았다. 즉 시민들의 정치적 저항을 통해 마침내 단죄가 이뤄졌다. 촛불시민들은 이 사면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청와대 한 관계자는 12월 6일 한 언론과의 통화에서 "문 대통령은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에 대한 사면을 배제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대통령은 여러 차례 사면의 조건으로 국민의 동의를 언급했다. 이처럼 사면 가능성이 일축된 상황에서 예기치 않게 사면이 단행된 배경에 대해 온갖 추측과 해석들이 가능하다. 선거를 겨냥한 정치적 사면이라는 평가도 생겨났다. 촛불혁명에 대한 배신이라는 민감한 언표까지 등장했다. 일각에서 사면 조치 규탄과 취소를 요구하는 서명들이 이어지고 있다.

여권은 연일 마치 지도자의 고뇌에 찬 결단을 통해 사면이 결정됐다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연초의 반대 여론과 달리 이 사면에 대해 찬성하는 국민들의 비율이 다소 높다는 조사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선거 정국이라는 특수성을 반영한다면 그리 유의미한 통계상의 변화라고 평가하기는 곤란하다. 현재 국민들의 압도적 동의는 얻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사면으로 화해의 역량 실현할 수 있는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사면의 가치를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과연 특정의 '사면'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용서가 지닌 화해의 역량에 반하는 범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용서 가능하다'고 말했다. 헤겔은 용서의 무한한 가능성과 용서가 지니는 화해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역시 용서가 가져다주는 화해의 잠재성과 새로운 미래를 힘주어 역설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특정한 사회정치적 정황에서 요구되는 사면이나 용서에 대해서는 경계한다. 이는 그 범죄의 피해자들이나 관련 당사자들이 그에 대해 저항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사회적 통합을 위한 용서의 수단화에 대해 주저없이 비판한다. 직접적인 당사자의 자발적인 용서와 동의가 선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특사와 관련해서는 그 어떠한 명분보다 촛불 시민들의 반응과 정서가 첫번째 고려사항이 되어야 마땅했다.

이번 사면조치가 '정치적 사면'이라는 비판은 모호한 말이기도 하고 그리 온당치도 않다. 정치적이지 않은 사면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면이라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이다. 아니 사면 그 자체가 정치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사면을 정치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과 국민의 동의에 기반하지 않은 일방적 사면이다.

이번 사면에서 우리가 심각하게 보아야 할 점은 마치 사면이 통치권력을 행사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므로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논리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사면의 윤리 위에 정초한 사면의 정치

사면의 정치는 사면의 윤리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윤리는 정치 너머에 있다. 따라서 사면권자는 윤리가 비추는 별빛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사면을 선택해야 한다. 사면의 정치와 사면의 윤리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적절한 긴장을 유지해야 바람직한 것이다. 그 긴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통치권자 개인의 양심이 아니다. 시민들의 목소리와 정의의 요구가 그러한 윤리적 긴장을 일으킨다.

이번 특사가 사면의 윤리에 적합한 일로 평가될까? 아니면 탈역사화된 왜곡된 사면으로 평가될까? 아직은 알 수 없다. 문제는 사면이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는 점이다. 사면장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국민들의 가슴팍에 내던져졌다. 이는 순서가 뒤집어진 것이다. 공론화 과정은 생략되거나 무시되었고 사면은 전능한 통치행위가 되었다.

진실과 화해의 과정이 거세된 사면이 만연한 적대성을 완화하거나 저절로 화해나 통합을 가져다줄 리 없다. 과연 우리는 시민적 공론화 과정을 거쳐 사면이 시행되는 그런 날을 꿈꿀 수 있을까? 사면이 안겨다주는 화해의 기쁨을 모두 함께 만끽하는 그런 사회가 언제나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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