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치곡(致曲)' 사소함을 위대하게 만드는 힘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1-11-29 08: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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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에 지극정성 다할때 이윽고 이뤄지고
상황탓보다 치곡을 굳게 껴앉는 자세가 필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말라'는 제목의 책이 한때 서구에서 유행한 적이 있다. 그렇다. 쓸데없는 일에 몰두해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 '사소한 것'들을 가볍게 처리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사소한 것을 소중히 여긴다. 그것이 디테일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을 정교하게 다루어 정성을 다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 사소한 것에 정성을 다할 때 완성도가 높아진다. 성취감도 높다. 업무, 공부, 창작, 훈련, 수련, 대화, 활동 및 비즈니스 등 모든 영역에서 사소한 것은 큰 차이를 만든다. 나아가 정성을 다한 작은 것들이 모여 나를 만든다. 그것이 자신의 내공이 되고 새로운 변화와 도약을 이루는 동력이 된다.

중용 제23장에서 말하는 '치곡'(致曲)은 사소한 것을 위대한 힘으로 만드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치곡의 핵심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사소한 일 하나부터 지극 정성으로 하면 능히 誠하게 된다(致曲 曲能有誠). 성실하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뚜렷해지고, 뚜렷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움직이게 할 수 있고, 움직이게 하면 변하고, 변하게 되면 다른 존재가 된다(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효율성을 추구하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중한 것과 시급한 것에 우선순위를 둔다. 계획을 세우거나 일을 처리할 때에도 기본전략을 세우고 주력해야 할 영역에 힘을 집중한다. 모든 생산적 노동과 창조적 활동이나 사회적 행위에서도 단기간에 큰 성과를 내는 것을 성공이라고 여긴다. '돈'이 되지 않는 모든 것들은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무엇이든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수익을 창출해내는 일만이 가치있다고 여긴다. 이를 위해 대중의 기호를 민첩하게 파악하고 상품을 표준화해서 마구 찍어낸다. 효율성이라는 명령과 상품성이라는 절대 표준이 강요된다. 이렇듯 자본주의적 관성에 의해 전도된 가치를 다시 전도시키는 방법을 무엇일까? 그것은 사소함을 재발견하고 작은 것에 대해 미학적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일을 지극 정성으로 할 때 무언가 시작된다. 지극한 마음으로 몰입해 일하고, 마음과 신체를 투입해 사랑하고 나누고 연결되고 교류하면 에너지가 솟구치고 점화되고 불이 붙는다. 이윽고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타나고 드러나며, 새로운 에너지장이 만들어진다. 변화가 시작되고 새로운 공간이 형성되며 그 새로운 영토에서 새로운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작은 노력과 작업이 그래서 소중하다. 지극한 정성과 작은 디테일이 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고, 진흙이 도자기가 되는 질적 변화를 초래한다. 치곡이 말하는 바의 핵심은 성과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밀도 높은 정성, 이것이 변형의 길이다.

작가 혹은 창작자들의 작업 스타일은 '치곡'이 말하는 바와 맞닿아 있다. 작가의 글쓰기, 시인의 시작, 소설 쓰기, 아티스트나 건축가의 작업, 음악가의 공연 등 대다수의 예술적인 창조 작업은 일종의 수공업적 작업이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넣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작품이 탄생한다. 아무리 기발한 착상이나 깊은 사유의 분비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글자 하나하나, 악보 하나하나, 이미지 조각 한 컷 한 컷, 스토리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 손가락 터치 하나하나, 한 호흡 한 호흡, 분절된 소리 하나 하나의 연결과 리듬의 접속, 선과 선의 만남, 물감 한 방울방울을 연결시키는 수작업을 거쳐서 예술작품은 탄생하게 된다.

변화가 일어나는 경지는 단순한 반복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지극한 마음'을 다할 때 이뤄진다. 소설가 신경숙의 '외딴 방'이 영어로 번역됐을 때 미국 언론은 찬사와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은 신경숙의 소설 속의 '모든 문장이 디테일로 꽉 차 있다'(Every sentence is saturated in detail)고 평가했다.

비록 번역된 문장이지만 정성을 다해 펜을 움직인 소설가의 섬세한 작업의 흔적을 읽어낸 것이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대충 암기하지 않는다. 학습내용 개요뿐 아니라 원리를 이해하고 세부적인 연관성까지 파악해 기억한다. 개요와 함께 디테일에 정성을 다한다. 어디 글이나 공부만 그럴까? 장인 및 노동자의 노동, 아티스트의 작품 활동, 작가의 글쓰기, 음악가의 연주, 학습자의 탐색과 연구, 일상적 노동, 관계 맺기, 직업적 전문성, 사회정치적 변화를 이루는 활동 등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정성을 투입하려는 마음을 쉬 가지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정성을 다 쏟을 때 주어지는 결과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정성을 다하는 그 반복과 지루함과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다. 사실 오늘날의 사회는 노력의 결과에 대해 희망과 신뢰를 주는 사회가 아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절망과 우울은 이와 직결돼 있다. 최소한의 기회조차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소외 현상이다. 치곡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를 믿지 못하는 비극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꾸는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태도는 상황을 탓하기보다 치곡을 굳게 껴안는 자세다. 정성을 다해 나를 쏟아 붓는 시도와 실천조차 포기해 버린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학적 태도가 요구된다. 성과부터 계산하는 경제성의 원리를 놓아버리고, 정성을 다하는 노동과 활동 자체에 주목하는 태도 말이다.

새해가 시작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다음 해를 위해 온갖 계획들을 세운다. 하지만 몇 주 몇 달이 안돼 그 계획을 수정하거나 포기해 버린다. 꿈을 꿀 때는 즐겁고 계획을 세울 때는 아이디어가 반짝였다. 처음 시도할 때는 의욕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곧 주저앉아 버린다. 이유가 무엇일까? 지극정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내던져 정성을 다해 몰입하면 낯선 기쁨이 찾아온다. 작은 일 하나를 지극 정성으로 행할 때 숙련이 된다. 그리고 디테일을 정교하게 마무리할 때 완성도가 높은 작업과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특히 사소한 차이가 만들어내는 '창조적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새로운 존재로 생성되고 변형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꿈꾸는 일보다, 계획을 세우는 작업보다 중요한 것은 결행하는 힘이다. 하지만 결행만으로 부족하다.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마음, 치곡의 열정을 그 실천 속에 담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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