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견딤과 치욕이라는 생존방식–한강의 '나무불꽃'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10-15 14: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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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성, 나무-되기와 같은 별난 상상력으로 반짝이는 한강의 중편소설 '나무 불꽃'을 읽으면 독자는 내내 우울하고 먹먹해진다. 맨 정신으로 소설을 끝까지 완독하려면 아마 등장인물들에 대한 공감이나 행간 속 의미찾기는 접어두고 뜀박질하며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채식주의자>의 3부 '나무 불꽃'은 나무가 되고자 음식을 거부하는 영혜의 소멸 과정과 동생을 돌보며 자신의 삶의 서사를 잔인하게 회상하는 영혜 언니의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혜의 음성이나 소설 속 여러 은유들은 사실 해독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아파할 수 있을까? 이 화두를 내내 씹으면서 소설을 겨우 읽어내었다. 난해하고 불편하고 어두운 색조의 소설이다.

◇ 나무가 되고 싶어

영혜는 축성 정신병원의 폐쇄병동에 갇혀있다. 영혜의 실종 소식을 듣고 언니는 병원으로 찾아간다. 영혜는 어느 숲 속에서 발견되었다. "깊은 산 비탈의 외딴 자리에서 영혜는 마치 비에 젖은 나무 들 중 한 그루인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이후 언니는 수요일마다 영혜에게 찾아간다. 언니는 지금 아들 지우를 간호 중이다. 닷새째 아들 지우가 아팠고, 그녀 역시 닷새째 제대로 자지 못했다. 전화로 영혜의 면회 일정을 잡은 후 몸을 둥글게 말고 소파에 모로 누워 잠시 잠에 들었는데 잠결에 영혜의 목소리를 듣는다. 꿈인지 환청인지 알 수 없다.

"언니, 내가 물구나무 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응,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활짝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156쪽, 180쪽

동생 영혜는 음식을 거부하고 있다. 의사는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 자체를 알 수가 없고, 약도 전혀 효과를 나타내지 않는다고 답답해한다. 이 병원에 동생을 처음 데려오던 날, 입원 수속을 기다리던 영혜는 창밖의 느티나무에 시선을 던지며 이렇게 말한다. "응…… 여기엔 큰 나무들이 있네." 병실에 들어서서는 이렇게 독백한다. "…… 여기서도 나무가 보이네." 그리고 언니에게 속삭인다. "언니……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언니는 서쪽 복도 어딘가에 물구나무 서 있는 기괴한 여환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영혜였다. 영혜는 나무들이 모두 물구나무 서기를 하고서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식을 권유하는 언니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 살아내었지만 실은 죽어 있었어

영혜 언니에게 무수한 기억들이 필름처럼 상영된다. 그 기억은 아버지와 영혜 그리고 남편 J와 관련된 아프고 치욕스런 영상들이다. 병원으로 오는 길의 터널을 지나며, 비 내리는 숲을 바라보며, 병실에서, 해독하기 힘든 영혜의 말을 들으면서 예기치 않은 기억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혀 터진다.

기억의 파편 하나. 어린 시절 손버릇이 나쁜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영혜를 때렸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자신은 용케 피해갔다.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 아버지께 바쳤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방식이었을 뿐임을." 

또 하나의 기억. 이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생생한 기억이다. 이년 전 사월, 그녀는 한 달 가까이 하혈을 했다. 산부인과로 향하던 국철 승강장에서 침목들 사이로 손질 안된 파릇한 풀들을 보며 그녀는 깨닫는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치욕적인 기억 하나. 그녀는 남편과 결혼하고서 최선을 다해 남편을 쉬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체념에 익숙해지고 체념할 수 있는 것들을 체념하게 되었다. 어느 여름의 끝자락, 언제나 그랬듯 며칠 만에 새벽에 집에 들어온 남편이 그녀를 껴안았을 때 그녀는 그를 밀쳐냈다. '피곤해요.' '잠깐만 참아.' 남편은 당연한 듯 그녀를 강간했다.
"그때 그녀는 기억했다. 그 말을 그녀가 잠결에 무수히 들었다는 것을. 이 순간만 넘기면 얼마간은 괜찮으리란 생각으로 견뎠다는 것을. 혼곤한 잠으로 고통을, 치욕마저 지우곤 했다는 것을." 

독자는 소설에서 영혜 언니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그녀는 '지우 엄마'다. 그녀는 성실한 여자이자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맏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최선을 다했고, 모든 이에게 친절했으며, 열심히 노동하고 사력을 다해 가정과 가족을 돌봤다. 하지만 이제는 뼈저리게 깨닫는다. 자신이 살아본 적이 없었음을, 다만 견뎌왔을 뿐임을.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221쪽.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렇게 소설이 끝나다니. 시원스런 앤딩도 없이, 숱한 질문들과 의문들만 잔뜩 던지고서 갑자기 서사의 문이 닫혀버린다. 현대 문학이 으레 그랬듯이, 삶의 부조리함과 터무니없음을 마구 드러내기만 하고 어떤 대답이나 최소한의 희망에 대해선 철저히 함구하는 방식으로.

◇ 이젠 보여, 쏘아볼 거야

영혜는 죽어가고 있고 언니는 이미 죽은 삶을 살아왔다. 영혜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고, 언니는 퍼렇게 빛나는 죽은 나무였다. 이 두 자매의 슬픈 운명은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가부장제 질서의 안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여성들의 삶의 서사와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소설은 이렇게 비유하고 있는 것 같다. 가부장제라는 어두운 숲은 여성들을 식물화시키고, 죽어가는 혹은 죽은 식물들의 삶 위에 생존하는 군집이라고.

소설집 <채식주의자>에는 가부장제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버지의 폭력, 남편의 무책임, 지칠 대로 지친 친정 엄마, 영혜의 악몽과 착란, 지우 엄마의 희생과 치욕적 삶 등등. 특히 3부 '나무 불꽃'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분비물인 맏딸 이데올로기에 초점이 두어진 것으로 읽힌다.

알다시피 장녀 혹은 맏딸에게는 이런 가르침이 주어지고 강요되었다. '너는 아빠를 기쁘게 해야 해, 동생들을 돌보아야 해, 부모를 책임져야 해, 남편을 잘 쉬게 해야 해. 아이를 잘 기르고 양육해야 해, 열심히 일해서 집 안을 일으켜야 해. 끝까지 책임 져야 해.' 이런 목소리가 바로 장녀 이데올로기의 신조다. 이런 주문은 홀로 무거운 십자가를 진 메시야의 이미지로 내면화된다. 소설 '나무 불꽃'은 지우 엄마 역시 가부장제 폭력에 의한 불쌍한 희생자란 사실을 규명해내는 증언인지도 모른다. 신체 폭력은 용케 피했지만 그 힘이 두려워 순응하고 복종해야 했던, 부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남자의 무책임과 무시와 교묘한 폭력을 감내한 인고의 이야기로 채워진 고발 말이다.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에서도 나무-되기가 등장한다. 소설 속 화자는 아버지가 한 그루의 나무로 변신하는 꿈을 꾼다. 아버지의 몸에서 뿌리가 나와 가지가 뻗고 잎이 생기고, 그 – 나무는 두꺼운 땅을 뚫고 뿌리를 깊이 내려 부드러운 토사층을 지나 딱딱한 암반층에 이르고, 나중에는 바다에 닿는다. 순미와 우현도 나무로 변한다.

"순미가 변해서 된 나무는 우현이 변해서 된 나무에 달라붙는다. 가지가 사람의 손처럼 상대방의 줄기를 끌어안고 뿌리가 사람의 발처럼 상대방의 뿌리에 얽힌다. … 나무가 됨으로써 그들은 사람으로 있을 때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을 이루었다." <식물들의 사생활>, 문학동네, 242쪽

이승우는 나무로의 변신을 어떤 근원에 가닿는 영혼의 확장으로, 아울러 연리지처럼 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의 결합으로 그렸다. 한강의 나무는 이와 전혀 다르다. 나무가 되기를 바라지만 나무가 되지 못하는 식물 인간의 절규,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햇빛과 빗물만 먹고 살기를 갈망하는 죽음에의 충동,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와 '육식의 성정치'(The Sexual Politics of Meat)에 의해 질식당한 영혜와 지우 엄마의 운명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영혜는 삶을 거부하며 저항하고 있고, 언니는 삶이 치욕이었음을 깨닫고 저항하기 시작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그 맛은 쓴 맛일 것이다. 해독하기 어렵고 그 어떤 해답도 보여주지 않는다. 생명의 강이나 열매가 무성한 푸른 숲 따위도 희망하지 않는다. 물구나무 서기를 할 때만 제대로 보이는 세상, 그 세상은 활활 타오르는 나무 불꽃들로 참혹하게 빛난다. 그걸 차갑게 응시할 일이다. 어둡고 끈질기게 바라보는 언니의 시선, 그것이 새로운 서사의 도래를 암시할 뿐이다.

*
'육식의 성정치'(The Sexual Politics of Meat)는 캐럴 제이 애덤스가 쓴 책 제목이다. 애덤스는 여성 억압과 육식 및 동물 착취가 동일한 억압적 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즉 육식은 단순한 식습관이 아니라 권력, 지배, 폭력의 상징으로 작용한다고 진단하며, 이 구조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 우월주의를 유지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 분석한다. 1990년에 쓴 이 책의 내용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문제의식이 거의 동일하며, 소설가 한강은 이러한 담론의 흐름에서 문학 작품으로 소설을 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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